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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1-02 조회수 : 127

마태오 25,1-13 
 
사람은 언제, 왜 죽고 싶어질까? 죽은 자를 기억할 줄 모를 때  
 
 
영화 ‘P.S. 아이 러브 유’(2007)에서, 주인공 홀리는 가장 사랑하는 남편 제리가 뇌종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삶의 모든 의욕을 잃고 집안에 틀어박혀 절망에 빠집니다.
그녀는 남편 없는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30번째 생일날, '죽은 남편' 제리로부터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합니다.
제리는 자신이 죽은 뒤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그녀가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편지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새 옷을 사러 가", "무대에 올라 노래해 봐", "아일랜드로 여행을 떠나"… 남편이 '죽음 너머에서' 보내오는 사랑의 편지들은, 절망에 빠져 있던 홀리를 한 걸음씩 세상 밖으로 끌어내고,
마침내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합니다.  
 
애니메이션 ‘코코’를 보면, 멕시코의 '죽은 자들의 날' 전통이 나옵니다.
그 세계관에서 영혼의 '최종적인 죽음'은, 이승에서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한 사람이 사라졌을 때 찾아옵니다.
기억되지 못하면,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위령의 날 죽은 자를 기억합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는 저승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익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를 죽을 만큼 사랑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죽고 싶을까요? 사람은 만들어졌고, 만들어진 것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에너지는 ‘사랑’입니다.
기름 없는 차는 움직일 수 없듯이, 사랑받지 못하면 자기 스스로 죽어 마땅한 존재라고 여깁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삶은 '사랑받지 못함'과의 처절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고, 화가가 되어서는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를 '광인'이라 조롱했습니다. 
 
그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랑은 동생 테오의 재정적, 정서적 지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자신이 동생에게 짐이 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그가 자신의 귀를 자른 충격적인 사건 역시, 유일하게 곁에 있던 친구 고갱마저 자신을 떠나려 하자 벌인 극단적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슬픔은 영원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아무도 없는 밀밭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죽음은 세상의 몰이해와 냉대 속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던 한 영혼의 마지막 절규였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을 사랑했던 부모를 기억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자신은 사랑받았고, 자신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미녀가 진짜 괴로웠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세상의 사랑을 위해 아버지의 사랑을 잊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여길 때 살고 싶은 마음을 잃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이유도 자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를 사랑한 분들은 죽어서도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위 영화 ‘P.S. 아이 러브 유’에서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어, 그 홀로 남은 사람이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믿음을 줍니다.  
 
가수 비, 곧 정지훈 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삶을 막살아버리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침대를 뒤집어 엎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의 편지와 통장이 발견되었습니다.
엄마는 이 통장의 돈을 남기기 위해 짐이 되지 않으려고 어쩌면 먼저 하늘나라로 가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에 자극받는 비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이것이 '기억'의 힘입니다.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기억하려 할 때 오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느낌을 되살립니다.
그래서 자존감을 주고 살아갈 힘이 됩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성체성사를 세우시며 "나를 '기억' 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파스카의 기적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 기둥을 세웠습니다.
우리의 '미사'(전례)와 '기도'는 바로 이 '기억'을 위한 거룩한 장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다섯은 슬기로웠고 다섯은 미련했습니다.
그 차이는 단 하나, '기름'을 준비했느냐의 여부였습니다.  
 
이 '기름'은 무엇일까요?
이 기름은 바로 '기억'입니다.
더 정확히는,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억'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에너지를
잃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의 귀한 자녀인데, 어떻게 저 사람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라는 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편지’로 자신을 기억하게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방식으로
그 기억이 되살아나게 하십니다.
추운 겨울밤, 방안에 온기를 지펴주던 연탄불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연탄불을 보면, 한겨울 새벽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홀로 일어나, 그 차가운 연탄을 갈아내시던 어머니와 어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 기억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제 가슴을 데우는 따뜻한 '온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 온기가 바로 제가 오늘을 살아갈 '사랑의 에너지'가 됩니다.  
 
그런데 부모가 나를 가장 사랑한 표징은 ‘밥’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밥은 제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박철민 씨가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어머니가 해 주셨던 음식들을 셰프들이 한 것을 먹고는 어머니가 생각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자주 가져야 합니다. 
 
잊혀지기를 기다렸다가 또 기억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미련한 처녀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규칙적으로 하여 기름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미련한 처녀는 구체적으로, 아침기도는 하면서
'저녁 기도'는 생략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만약 아침기도 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저녁 기도를 소홀히 하는 것은, 등불은 가졌으되 기름을 채우지 않는 '미련한 처녀'의 모습입니다. 
 
왜 저녁이 중요합니까?
창세기는 하루의 완성을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창세 1,5) 고 말합니다.
아침이 아니라 '저녁'이 하루의 시작이요 기준입니다.
우리의 죄는 대부분 '저녁'에, 즉 하루의 에너지가 다 떨어졌을 때, 하느님의 자녀라는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나 저녁때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면, 그 기름을 밤을 밝은 대낮처럼 잘 지내게 할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시간도 바로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 오후 세 시였습니다.
그분은 하루가 저무는 가장 어두운 시간에 당신의 피로 '기억'의 기름을 우리에게 쏟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해 이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복음은 우리 자신을 향한 경고입니다. 
"너는 너의 등불에 아침저녁으로 기름을 채우고 있느냐?" 
 
우리는 모두 인생의 '저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죽음'이라는 문 앞에서 신랑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기도는 물론이요, '저녁 기도'로,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기름을 채워 넣을 때, 우리는 미련한 처녀처럼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슬기로운 처녀처럼, 우리의 따뜻한 '기억'(기름)이 담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며 당당히 그분께 나아갈 것입니다. 
지금 이 미사 중에,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의 차가운 심장을 성령의 '온기'로 채워주시도록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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