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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4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1-04 조회수 : 87

루카 14,15-24 
 
그가 형제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이유 
 
 
찬미 예수님!
서기 64년, 로마 제국의 심장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9일 동안 계속된 대화재로 도시의 3분의 2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이재민이 거리에서 절규하고 있을 때, 황제 네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가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팔라티노 언덕 위 자신의 궁전 발코니에서 리라(Lyra)를 켜고, '트로이의 함락'을 노래하며 불타는 도시를 배경으로 시적 영감을 만끽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수만 명의 고통을 자신의 예술적 쾌락을 위한 배경음악으로 삼을 수 있습니까?
왜 그는 형제들의 마음을, 그 처절한 고통을 읽지 못했을까요? 
 
네로는 이미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 불릴 만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의붓형제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했고, 여러 명의 아내를 살해하거나 유배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잔혹함의 정점에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 준 '최고의 은인',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살해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런 괴물로 만들었을까요? 
 
많은 학자는 그 원인을 그의 부모, 특히 어머니 아그리피나에게서 찾습니다.
아버지는 네로가 3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네로의 세상은 온통 어머니였습니다.
아그리피나는 야망의 화신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삼촌이자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를 유혹해 결혼했고, 황제의 친아들을 밀어내고 네로를 황태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황제를 독살하고, 16살의 아들 네로를 로마의 주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양심, 즉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나에게 잘해주는 이(부모)에게 보답을 하여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는 신호를 배우는 데서 시작됩니다.
이것도 마치 걸음마처럼 엄마의 칭찬으로 조금씩 발전시키는 하나의 능력입니다.  
 
어린 네로가 어머니에게 그림을 그려다 주거나, 작은 선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 했을 때,
아그리피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녀는 아들의 작은 '보답'에 진심으로 기뻐했을까요? 
아닙니다. 역사가 증명하듯, 그녀의 유일한 관심은 '권력'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의 작은 정성보다는, 아들이 얼마나 더 영리하게 권력을 쟁취할 수 있는지에만 몰두했습니다.
자기 외아들이 예술인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림 그릴 시간에 수사학 공부나 더 해라."
"그런 사소한 일로 내 시간을 빼앗지 마라."
아들은 지쳐갔을 것입니다.
나의 '최고 은인'인 어머니조차 나의 보답으로 기뻐하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를 기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네로는 타인을 기쁘게 하려는 노력을 포기합니다.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한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아니, 타인의 마음을 읽는 감정의 근육이 전혀 발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을 낳아주고 황제로 만들어 준 어머니의 마음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타는 로마 속에서 절규하는 자신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마음 읽기'에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잔치에
오십시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모두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시작하였다." (루카 14,16-18) 
 
한 사람은 "밭을 샀으니" 가봐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으니" 시험해 봐야 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 핑계들이 왜 그렇게 주인을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그들이 단지 바빠서 못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인의 마음'을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잔치를 연 주인의 마음은 무엇입니다. '기쁨'입니다. 자신의 풍요와 기쁨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는 손님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와서 먹고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미사에 초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자신을 내어주는 잔치를 마련하시고, "와서 나의 기쁨에 참여해다오.
그것이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다"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그 마음을 읽지 못합니다. 
 
그들은 주인의 '기쁨'보다 나의 '밭', 나의 '소', 나의 '아내'가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가장 큰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주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느님께 죄를 지으며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분노합니다. 
 
"화가 난 그 집주인이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 데려오너라.'" (루카 14,21)
주인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자신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더는 희망을 갖지
않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마음을 읽을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맺을 능력을 상실했기에, 그들은 네로와 같은 존재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마음 읽는 능력'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만약 네로처럼, 혹은 부모에게 버림받아 그 능력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 '김희아' 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의 절반 이상이 '불타는 듯한' 붉은 모반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부모는 이 아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녀를 고아원에 버렸습니다.
그녀는 평생 "왜 나만 이래야 해?" 라고 절규하며, 자신을 이렇게 만든 부모와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기도는 "하느님, 제발 이 점만 없애주세요"였습니다. 
 
성인이 되어 점을 빼는 수술을 받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성당에 나아가 예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그런데 그 기도 중에 환시를 보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눈물은, 김희아 씨 자신이 우는 것보다 '더 슬픈 눈물'이었습니다.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아, 저분은 나를 보며 나보다 더 아파하고 계셨구나.
나는 내 아픔만 생각했는데, 저분은 내내 나를 보며 울고 계셨구나.' 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수술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심합니다.
"예수님, 이제 다시는 저를 위해 무엇을 청하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만 하며 살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해 주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아이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최고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은인(하느님)'의 마음을 읽자, '형제(이웃)'의 마음을 읽는 눈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왜 이웃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왜 그토록 쉽게 관계에서 상처받고 넘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십자가를 통해, 이 미사를 통해 얼마나 큰 은혜를
주셨는지 깨닫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분께 '보답'하는 하루를 살고 싶어집니다.
그분을 기쁘게 해 드렸다는 마음(양심)에,  기쁜 하루를 살게 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마음을 읽는 연습을 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내 곁의 남편, 아내, 자녀, 그리고 상처받은 이웃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이웃과 잘 지낼 수 없고, 이웃과 잘 지낼 수 없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미사 안에서, 나를 애타게 부르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고 그분을 어떻게 기쁘게 해 드릴까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만으로도 그분은 기쁘실 것입니다.
그러면 형제들과의 관계는 저절로 다 풀립니다. 그들의 마음도 읽을 능력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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