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17,7-10
쓸모 없는 종의 행복
찬미 예수님!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일의 위대함과 그 허무함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은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어부로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먼바다로 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배보다 더 큰 거대한 청새치를 만납니다.
그는 사흘 밤낮의 처절한 사투 끝에 그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취해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는 상어 떼의 습격을 받습니다.
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배에 묶여 있던 것은 살코기 한 점 없는 거대한 '뼈'뿐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듭니다.
이 노인의 모습은, 이 소설을 쓴 작가 헤밍웨이 자신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헤밍웨이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으며 세상의 모든 '일'을 성취했지만, 그 허무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엽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열정적인 '일'을 했지만,
세상은 그의 '일'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절망 속에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결국 스스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이토록 위대했지만, 왜 그 '일'은 그들에게 구원을 주지 못했을까요?
영화 ‘쇼생크 탈출’의 브룩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마트에서 '일'을 하지만,
그 '일'은 누구라도 '대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지 못하고, 그저 생존을 위한 발버둥일 뿐이었습니다.
여기, 이들과는 정반대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 무너진 성당을 재건하는 공사장을 한 여행자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똑같은 벽돌을 나르고 있는 세 명의 인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첫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빌어먹을 벽돌을 나르고 있소."
그에게 '일'은 그저 고통스러운 노동이었습니다.
두 번째 인부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땀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있습니다." 그에게 '일'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브룩스나 헤밍웨이의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인부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비록 남루한 옷을 입었지만, 눈을 빛내며
환한 미소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께서 머무실 위대한 성전을 짓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 사람은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사람은 고통 속에서, 두 번째 사람은 의무감 속에서 일했지만, 세 번째 사람만이 완벽하게 행복했습니다.
그의 '일'은 더 이상 '대체 가능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나는 하느님께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비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밭에서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얼른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하고 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명령한 것을 다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 종에게 고마워하겠느냐? ...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9-10)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굉장히 차갑게 들립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했는데, 고작
'쓸모없는 종'이라니?"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노예의 언어'가 아니라, '사랑의 언어'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일'을 합니다.
그 일이 그 자체로 즐거울까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압니다.
자신이 공부하는 그 '일'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임을 압니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이 부모님께 '꼭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100점 맞은 시험지를 들고 부모님께 달려가며 행복해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벽돌공이 "나는 성전을 짓고 있다"고 행복하게 외쳤을 때, 그가 나중에 하느님께 가서 "제가 이렇게 위대한 일을 했으니 상을 주십시오"라고 자랑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는 "주님, 당신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이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그 '일'을 하는 내내 제가
가장 행복했습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는 고백의 진짜 의미입니다.
"주님, 저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 '일' 자체가 저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고 상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를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꼭 필요한 존재'라는 자존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일'을 통해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 오늘 제가 무슨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찾아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 그날의 행복도는 매우 높이 상승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배신하고 '쓸모없는 종'이 되어버린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베드로는 죄책감에 빠져 자신의 옛 '일', 즉 생존을 위한 고기잡이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실패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단 하나의 관계를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은 그에게 '일'을 주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의 의미와 살아갈 힘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의 스승으로, 목자로 불림 받았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설거지이든, 운전이든, 아이를 돌보는 일이든,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헤밍웨이의 허무함이 아니라 세 번째 벽돌공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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