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식
찬미 예수님!
경기도 성남시 단대동에는 작은 개척교회인 '샬롬교회'가 있습니다.
이곳의 김정하 목사님은 루게릭병을 앓고 계십니다.
온몸의 근육이 서서히 굳어가고, 결국엔 숨 쉬는 근육마저 멈춰버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휠체어에 앉아 겨우 손가락 하나를
움직여 컴퓨터 마우스로 세상과 소통하십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에게는 아주 특별한 다섯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필리핀 등지에 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컴패션 후원 아동들입니다.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였던 그는 이 아이들을 도울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구두닦이’였습니다.
건강했던 시절, 그는 매일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구두 통을 메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의 구두를 닦아 번 돈, 그 피 같은 돈을 모아 아이들에게 보냈습니다.
루게릭병이 찾아와 손이 굳어가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구두솔을 놓지 않았습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구두약이 온통 옷에 묻어도,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몸도 성치 않으신데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목사님은 어눌해진 발음으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눈빛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은… 제 심장입니다.
심장이 멈추면 죽는 것처럼, 이 일을 멈추면 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이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목사님에게 무엇을 해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들을 위해 자신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그 아이들은 그에게 남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언제일까요?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줄 때일까요? 아닙니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나의 ‘피’를 쏟을 때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이유는, 자녀 안에 자신의 피와 살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가르쳐 준 비밀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 왕자가 지구의 수많은 장미꽃을 보고 실망했을 때, 여우는 말합니다.
“네 장미꽃을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그 꽃을 위해 바친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에 있는 장미를 위해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바람막이를 씌워주었습니다.
그 수고와 희생의 시간이 있었기에, 그 장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과 ‘책임’이, 어린 왕자가 지구의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의 별로 돌아갈 수 있게 한 ‘구원’의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고, 모두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뛰어난 ‘치유자’, ‘문제 해결사’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 그만 돌아왔을까요? 나머지 아홉 명에게 예수님은 그저 ‘병을 고쳐준 고마운 분’ 정도였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치유’라는 선물을 받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선물을 가지고 각자의 삶으로, 세상 속으로 바쁘게 떠나갔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더러운 몸을 깨끗하게 해주신 분,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을 그냥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바치는 ‘예배’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선언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7,19)
아홉 명은 ‘치유’를 받았지만, 이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치유는 육신의 문제 해결이지만, 구원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그분은 우리의 ‘문제 해결사’입니까, 아니면 ‘구원자’이십니까?
많은 신자가 성당에 와서 청합니다.
“주님, 이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이 사업이 성공하게 해주십시오.
우리 자녀가 잘되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치유자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단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아홉 명의 나병 환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주님을 잊고 세상 속으로 떠나버릴 것입니다.
김정하 목사님의 후원 아동들이 목사님의 도움만 받고 끝난다면, 그들은 목사님을 ‘이용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목사님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면, 그들도 목사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편지를 쓰고, 기도하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땀’을 흘려야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신부님의 사랑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후, 그들은 신부님의 뜻을 이어받아 의사가 되고, 약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신부님을 위해 자신들의 ‘피’와 ‘땀’을 쏟았습니다.
그러자 그들 안에서 이태석 신부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라고 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전부’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내어드렸을 때, 비로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관념적인 신’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살아계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모든 피를 쏟으셨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심장’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그분께 응답하고 있습니까?
주일 미사 한 시간 참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사, 예배, 봉헌, 기도는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분께,
나의 ‘피’와 같은 소중한 것(시간, 재물, 마음)을 쏟아붓는 시간입니다.
이것 없이는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문제 해결사’로 이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위대한 신학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기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내가 너에게 어떤 보상을 주면 좋겠느냐?”
세상의 부와 명예, 지혜, 무엇이든 청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Non nisi Te, Domine. (주님,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문제 해결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부’였고, 그의 유일한 ‘구원’이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당신이 베풀어 주신 치유와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선물보다, 선물을 주신 당신을 더 원합니다.
당신만이 저의 참된 구원자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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