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노아와 롯의 시대를 예로 들어 “사람의 아들의 날”을 설명하신다. 세상의 종말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순간에 도래한다.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며 일상의 삶에만 몰두했다. 롯 시대에도 사람들은 매매하고 심고 집을 지으며 살다가, 하룻밤 사이에 멸망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종말의 날은 평범한 일상에서 갑작스레 찾아올 것임을 알려준다.
노아가 산 위에 방주를 짓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그 방주는 홍수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오늘날 구원의 방주는 교회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때로는 조롱과 무시를 당하지만, 주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도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방주를 교회로 해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방주 밖에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Sermo 96,7) 이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몸소 머무시는 구원의 도구임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라고 경고하신다. 롯의 아내는 구원의 길을 걷다가 과거를 그리워하며 뒤돌아보았고, 결국 소금기둥이 되었다. 이는 결단의 부족과 옛 삶에 대한 미련을 상징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이는 과거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옛 습관을 붙잡고 있다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Hom. in Gen. 43,3) 우리도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에서 과거의 집착, 세속적 안락을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복음은 또한 종말의 날에는 공동체적 연대보다 개인적 책임이 강조된다고 가르친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어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질 것이다.”(34절). 이는 단순히 외적 친분이나 공동생활이 아니라, 각자가 하느님 앞에 책임 있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교리서는 이렇게 말한다. “각 사람은 죽은 뒤 즉시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으며, 삶에서 그리스도와 어떻게 일치했는지에 따라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다.”(1021-1022항) 따라서 우리는 단순히 “믿는 사람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신앙은 각자의 응답과 회개를 요구한다.
“시체가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도 모여든다.”(35절) 성 예로니모는 이를 “시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린 몸을 상징하고, 독수리는 그분을 향해 모이는 선택된 이들을 가리킨다.”(Commentarium in Matthaeum 24,28) 즉, 종말의 날 선택된 이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로 모이는 독수리처럼 주님께 이끌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뒤돌아보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32절) 신앙은 단호한 결단과 꾸준한 전진을 요구한다. 세상은 여전히 교회를 조롱할지라도, 교회는 구원의 방주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 우리를 당신 품에 모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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