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이들의 하느님
[루카 20,27-40]
대사제들, 바리사이들, 율법 학자들 등을 포함한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음에 몰아넣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에 대한 백성의 신뢰도를 떨어뜨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시니,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일련의 까다로운 질문들을 퍼붓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답변으로 말미암아 청중들이 갈라서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분에 대한 믿음이 엷어지거나 사라지게 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사제계급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두가이들이 나섭니다. 이들은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특권계급이었으며, 일반 서민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던 분파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친(親)로마적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천사들의 존재나 영적인 세계, 사후의 부활을 거부했던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했기에, 다니엘서가 싹틔우기 시작한 부활에 대한 모든 개념과 희망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줄곧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이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회개가 절박하다고 가르치고 계시나, 죽음과 함께 인간은 영원히 사라지는 존재라면 이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사두가이들은 부활에 대한 개념과 희망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예수님의 가르침을 침몰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사람들의 질문에 답변은 하시지만, 인간의 천박한 지혜 차원이 아니라, 고고한 수준으로 끌어올려 답하십니다. 사두가이들은 모세오경이 명기하고 있는, 이름하여 수혼제(嫂婚制: Leviratus법)를 근거로 질문을 제기하나(신명 25,5-10 참조), 이 법은 한 집안의 대를 잇도록, 또는 과부가 된 여인의 생존을 위해서 제정된 법이었으며, 더구나 원하지 않을 때는 절차를 밟아 저버릴 수도 있는, 그야말로 인간세계를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기에, 하느님 나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법이라는 사실을 숙지해야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하는 의도에서 억지로 엮어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 제상에 참여하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하는 이 한마디로 예수님의 답변은 충분했습니다. 부활 이후의 삶은, 사두가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상 생활의 연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사두가이들이 인정하는 모세오경을 인용하여, 모세가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상기시키시며, 따라서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는 결정적이며 위대한 가르침을 남기십니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스승님, 잘 말씀하셨습니다.” 하는 예찬이 가능하고, “사람들이 감히 그분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하는 고백이 가능하도록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당신 사명 수행의 마지막 여정인 예루살렘에서 마지막 가르침을 토해내십니다. 수난과 죽음과 부활, 이 가운데 사람들이 목격하거나 체험해 본 적이 없는 부활이라는 주제가 앞설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하는 가르침 앞에 섭니다. 이승에서도 살아 계신 하느님을 받들고, 저승에서도 살아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늘 주님의 뜻을 살피고 실천하는 삶, 늘 주님께 돌아서는 회개의 삶이 절실합니다.
오늘 하루, 살아 계신 하느님을 받들고 살며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기분 좋은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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