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루카 21,5-19: 너희가 참고 견디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1. 종말은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날
오늘 전례는 “영광중에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야훼의 날’, 곧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안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날을 묵상하게 한다. 말라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불처럼 타오르는 날이 온다. 교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어, 타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태양이 떠올라, 그 날개 밑에서 치유가 이루어질 것이다.”(말라 3,19-20) ‘불’은 단지 파괴의 상징이 아니라, 정화와 심판, 동시에 구원의 빛을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날의 불은 각 사람을 불태울 것이다. 그러나 불의 성격은 다르다. 불의는 벌을 받고, 의인은 정화된다. 하느님의 불은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다.”(Enarr. in Ps. 37,3)
2. 성전의 파괴 예고: 역사와 믿음의 분기점
예수님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은 세상의 중심이라 할 만큼 장엄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6절) 이 말씀은 단순히 건물의 멸망 예고가 아니라, 구약의 종교 체계가 완성되어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시대가 열릴 것을 선포하신 것이다. 성전의 파괴는 그리스도 자신이 새로운 성전, 즉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중심이 되심을 가리킵니다(요한 2,19 참조).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주님께서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은 단순히 파괴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성전, 곧 당신의 몸을 세우시기 위한 서곡이었다.”(Hom. 75,1)
3. “때가 가까웠다.”는 미혹: 거짓 그리스도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경고하신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8절) 종말론적 공포와 불안은 언제나 사람을 거짓 메시아와 허황한 예언으로 이끈다. 오늘날에도, 이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것을 종말로 해석하는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보다 두려움에 뿌리를 둔 신앙이기 때문이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교회는 마지막 시험을 거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거짓 메시아의 환상에 현혹될 것이다. 그 거짓 메시아는 종교의 탈을 쓴 거짓 구원이 될 것이다.”(675항) 참된 신앙은 두려움이 아니라 희망에서 자란다. 성 이레네오는 “거짓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느님을 잃고, 세상을 구원하려던 하느님의 사랑마저 거부한다.”(Adversus Haereses V,25,1)고 말했다.
4. 박해의 시대: 증언의 기회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변론할 말을 미리 준비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언변과 지혜를 주겠다.”(13-15절) 역사 속에서 교회는 늘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전해 왔다.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승리의 행진이 아니라, 고통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증거이다. 교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순교는 믿음의 최고 증거이다. 순교자는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며, 진리와 사랑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는다.”(2473항)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순교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분의 수난 안에서 그분을 닮아야 한다.”(Epistula ad Romanos, 6,3)
5.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종말의 덕, 희망의 완성
오늘 복음의 절정은 다음 말씀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19절) 이 구절은 종말론적 덕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단순히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 안에서 서 있는 힘을 뜻한다. 성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인내란, 폭풍 속에서도 하느님을 붙드는 영혼의 닻이다.”(Hom. de grat., 2) ‘인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구원을 붙잡고 사는 삶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인내는 사랑의 완성이며, 그분의 인내 안에서 우리는 참된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6.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 깨어 있는 현재
바오로 사도는 종말을 기다리며 세상을 외면하는 이들을 꾸짖는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2테살 3,10) 참된 기다림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적극적 사랑의 행위이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기다리는 자는 손을 놓지 않는다.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일 속에서 주님을 만난다.”(Homiliae in Evangelia, Lib. I, Homilia I, n.1) 교회의 종말론적 희망은 ‘하늘나라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 안의 성화’에 있다. 사목 헌장은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지상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수행될 때, 그 결과는 하늘나라에 그대로 반영된다. 세속의 활동은 하느님의 나라와 분리될 수 없다.”(사목 39항)
7. 결론: 깨어 있음의 신앙
종말론적 신앙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기다림이다. 우리는 마지막 날을 예언하거나 계산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그날을 매일의 충실함 안에서 준비하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묵시 3,20) 그분은 이미 매 순간 우리 문 앞에서 계신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의 책임과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을 맞이하는 종말의 자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그날은 먼 훗날이 아니다. 주님이 오늘 내 안에 오신다면, 그것이 나의 종말이요 완성이다.”(In Io. Ev. tract. 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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