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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9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1-19 조회수 : 244

사랑 앞에선 방관도 불순종이다  
 
 
찬미 예수님!
1944년 겨울,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지옥이었습니다.
나치와 헝가리 화살십자당원들이 유대인들을 매일 밤 다뉴브강으로 끌고 가 총살하던, 그야말로 '죽음'이 왕 노릇 하던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조르조 페를라스카'라는 이탈리아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공로로 '스페인 보호증명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타고 안전하게 스위스로 도망칠 수 있는 '편도 티켓'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남을 완벽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차역으로 가던 중, 유대인 아이들이 화물칸에 실려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몸 사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죄책감이 그의 발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안전한 생존'을 버리고 '거룩한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기차에서 내려, 이미 대사가 도망가고 텅 비어버린 스페인 대사관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스페인 영사 대리'라고 선언하는,
목숨을 건 '거짓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아무 권한이 없었지만, 마치 자신이 모든 권한을 가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미나'(보호증명서 한 장)를 가지고 위대한 '장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스페인 대사관 명의로 '안전 가옥' 8채를 확보하고, 수천 장의 가짜 보호증명서를 발행했습니다.
심지어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나치 최고 장교 앞에서도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나는 스페인 영사, 호르헤 페를라스카요! 이들은 스페인의 보호 아래 있소!"
그는 기차역으로 달려가 이미 아우슈비츠로 떠나려던 기차 문을 열고 사람들을 끌어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나' 하나로 5,2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귀족이 종들에게 똑같이 '한 미나'씩을 맡기고 왕의 자리를 받으러 떠납니다.
두 종은 그 한 미나를 가지고 "가서 장사하여" 열 미나와 다섯 미나를 남겼습니다.
그들은 주인을 '왕'으로 믿었기에, 그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거룩한 모험'을 감수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종은 그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는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루카 19,20-21)라고 변명합니다.
그의 죄는 장사를 하다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또 다른 부류가 나옵니다.
바로 "우리는 저자가 우리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루카 19,14)라고 외친 시민들입니다.
이 둘은 다른 죄일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정확히 같은 죄입니다. 
 
주인을 '무서운 분'으로 오해하여 두려움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종이나, 주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대놓고 반역한' 시민이나, 그 본질은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학교에 가라"는 뜻을 주었을 때, "싫어요!"라고 대들며 밖으로 나가는 자녀나,
"네..." 하고 대답만 하고 방구석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자녀나,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불순종은 똑같습니다.
하느님, 곧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나의 '왕'이시라면, 내 눈앞에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상황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분의 왕권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1964년 뉴욕,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아파트 앞에서 30분 넘게 살해당했습니다.
최소 38명의 이웃이 창문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거나 비명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나설 필요가 없어서', '누군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38명의 방관자들은 세 번째 종과 똑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전'이라는 수건에 '인간의 도리'라는 미나를 싸서 숨겼습니다. 
 
우리는 매일 이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전한 방관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거룩한 모험'을 감수하는 신앙인이 될 것인가.
구약의 에스테르를 보십시오.
그녀는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궁전 안에서 '안전'했습니다.
하지만 하만이 유다 민족을 몰살하려 할 때, 모르도카이는 그녀에게 "그대가 이럴 때에 침묵을 지키면...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 집안은 멸망할 것이오"(에스 4,14)라고 경고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에스테르는 '안전한 생존'을 버리고,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나아가는 '거룩한 모험'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미나'(왕비의 지위)를 가지고 '장사'하기로 결심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제가 죽어야 한다면, 죽겠습니다."(에스 4,16)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리는 죄책감. 어쩌면 이 죄책감이야말로 우리를 잠에서 깨우는 '천사'의 목소리일지 모릅니다.
2014년,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을 구출하라'는 '미나'(직분)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남기고 가장 먼저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미나'를 수건에 싸 들고 구명정에 올랐고, 수백 명의 생명은 바다에 잠겼습니다. 
 
이와 정반대의 선택을 한 선장이 있습니다. 1985년 11월, '전재용 선장'은 남중국해에서
원목을 싣고 항해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망망대해에서 작은 어선에 타고 있던 96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국제법상 그들을 구조하는 것은 선장의 '재량'이었습니다.
회사의 규정은 '그냥 지나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연료도 시간도 돈도 낭비되고, 혹시라도 전염병이나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선장이 져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칠 모든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굶주림과 공포에 질려 손을 흔드는 그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생명을 살릴 수 있는데 안 살리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룩한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항로를 돌려 96명 전원을 구조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나'(선장의 권한)를 가지고 가장 위대한 '장사'를 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나의 안전, 나의 이익, 나의 규정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라'는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수건이 아닙니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불순종이다.
신앙은 생명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모험'을 매일 떠나게 하는 나침반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한 미나'는 무엇입니까? 장사는 모험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으로 어떤 '장사'를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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