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서 4년을 버티게 한 단 하나의 습관
찬미 예수님!
우리는 소설 『로빈슨 크루소』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대니얼 디포가 완전히 창작해낸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는 '알렉산더 셀커크(Alexander Selkirk)'라는 스코틀랜드 항해사의 실제 체험이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와 '알렉산더 셀커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크루소는 '난파'라는 사고로 무인도에 갇혔지만, 셀커크는 '자발적인 선택'으로 무인도에 내렸습니다.
1704년, 셀커크는 '싱크 포르(Cinque Ports)'라는 배의 항해사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거칠고 불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있던 배가 낡아서 곧 침몰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선장과 대판 싸운 뒤 "이 배를 타고 가느니 차라리 무인도에 내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칠레 연안에서 670km 떨어진 '마스 아 티에라(Más a Tierra)'라는 무인도에 정말로 버려졌습니다.
그는 곧 다른 배가 자신을 구조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그곳에서 그가 보낸 시간은 무려 4년 4개월이었습니다.
그가 섬에 내렸을 때 가진 것은 옷가지, 칼 한 자루, 도끼, 그리고 '성경 한 권'뿐이었습니다.
첫 몇 달간 그는 해안가에 머물며 절망적인 고독과 싸워야 했습니다.
밤마다 해안으로 몰려나와 울부짖는 수천 마리의 바다사자 떼 소리는 그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오늘 복음 속 예루살렘처럼, 완벽한 혼돈과 멸망의 공포(세상의 혼란) 한가운데에 던져졌습니다.
그를 미치지 않게,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규칙적인 일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과의 중심에는 '아침'과 '저녁'의 기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해 준 우즈 로저스(Woodes Rogers) 선장에게 훗날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나는 그 섬에서 매일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고, 성경을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그는 섬에 달력을 만들어 날짜를 확인하며, 특히 '주일'에는 모든 노동을 멈추고 온전히 하느님과
만나는 '방문의 때'로 지켰습니다.
그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라는 매일의 자기봉헌을 통해, 무인도의 야만성이 자신의 내면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영적 방어벽을 쌓았습니다.
1709년 2월 2일, 마침내 우즈 로저스 선장이 이끄는 배가 그를 발견했을 때, 선원들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4년 4개월을 홀로 지낸 사람이 당연히 미쳐 있거나 언어조차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셀커크는, 짐승 가죽 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문명인보다
더 평온하고 맑은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즈 로저스 선장은 1712년에 출판한 자신의 항해 일지 『세계를 일주한 순항』에 이 놀라운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셀커크)는... 읽고,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이 고독 속에서 자신이 이전에 살았던 그 어떤 삶에서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셀커크는 세상의 모든 평화라고 여기던 것들이 사라진 무인도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
'하느님'(어머니)을 만나는 '방문의 때'를 지켰습니다.
그는 그 규칙적인 기도를 통해 '평화'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평화는 '장소'나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에 반대하다가 런던 탑의 차가운 독방에 갇혔습니다.
그의 아내 앨리스가 찾아와 "대체 왜 고집을 부리십니까? 여기 감옥보다 우리 집이 더 좋지 않습니까?"라며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토마스 모어는 평온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감옥과 내 집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여기도 하느님께서 계시고, 내 집에도 하느님께서 계시오."
그는 어떻게 감옥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요? 그의 평화는 '집'이나 '정원'(장난감)에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평생을 지켜온 '규칙적인 기도 시간'(아침/저녁)을 단 하루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를 놓치지 않았기에, 그는 왕의 위협 앞에서도 평화로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원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진은 현대 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무엇이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안정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연구했습니다. 수많은 변수 속에서 가장 강력한 요인은 '돈'이나
'학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규칙적인 가족 저녁 식사'였습니다.
아이에게 평화는 학교 등수나 스마트폰이 아닙니다.
부모이고 부모와의 규칙적인 만남입니다.
일주일에 단 몇 번이라도, 정해진 시간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규칙적인 만남'을 가진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훨씬 안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이 '저녁 의식'은 단순히 밥을 먹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루의 혼란을 마감하고, 가족이라는 '안식처'(어머니)로 돌아와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평화를 확인받는 '방문의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십니다. 왜 우셨습니까?
"네가 하느님께서 너희를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루카 19,44)
예루살렘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규칙적인 의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렉산더 셀커크와 달리, 그 제물(장난감)에만 매달려 정작 그들을 찾아오신
'하느님'(어머니)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오시는 때'에 하느님을 만나지 않고, 로마의 압제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세상'에게 평화를 구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평화를 가져다주는 길을 너 홀로 몰랐구나" 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기다릴 때 언제 돌아올지만 알아도 평화를 얻습니다.
평화는 때를 아는 자만의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5) 하느님께서는 하루의 시작을 '저녁'으로 보셨습니다.
하루의 혼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저녁 기도'로 하느님을 만나 평화를 얻고, '아침 기도'로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 우리 신앙의 리듬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말합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오는 게 더 좋아.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의식이 필요해."
'규칙적으로 만나는 것'은 우리 영혼을 준비시킵니다.
다니엘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예루살렘 쪽 창문을 열어놓고 하루 세 번, 아침-점심-저녁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로웠습니다.
세상의 장난감이 주는 헛된 평화에 속지 마십시오.
매일 정해진 '아침'과 '저녁'에, 나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의식'을 회복하십시오.
그 '때'를 아는 사람만이 참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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