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20,27-40
이런 사람과는 혼인 시키면 절대 안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대작 『죄와 벌』에서 우리는 인류 문학사상 가장 기이하고도 거룩한 커플을
만납니다.
한 명은 오만함에 빠져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찍어 죽인 살인자 라스콜니코프이고, 다른 한 명은 가난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파는 창녀 소냐입니다.
어느 날 밤, 촛불이 가물거리는 소냐의 누추한 방에서 살인자는 창녀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청합니다.
소냐가 떨리는 입술로 읽어 내려간 구절은 요한 복음 11장, '라자로의 부활'이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소냐의 목소리가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에 이르렀을 때, 라스콜니코프의 영혼을 짓누르던 죽음의 껍질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촛불은 꺼져가고 있었지만 두 죄인의 가슴 속에는 부활의 불씨가 옮겨붙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소설의 진짜 결말인 '에필로그'는 그들이 시베리아 유형지로 떠난 후를 그립니다.
어느 이른 아침, 강가에 앉아 있는 라스콜니코프 곁으로 소냐가 다가와 조용히 손을 내밉니다.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무릎을
끌어안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적습니다.
"그들을 부활시킨 것은 사랑이었다.
한 사람의 심장은 다른 사람의 심장을 위하여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
그들에게는 7년이라는 세월이 마치 7일같이 느껴졌다." 보십시오.
살인자와 창녀라는 꼬리표,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과거, 이 모든 '죽음의 흔적'들이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육체적으로 탐하거나 소유하려는 남녀가 아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원천이 되어주는 '완전한 친교', 즉 부활한 존재들의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사두가이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일곱 형제가 한 여자와 살다 죽었다면,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누구의 것)가 됩니까?"
이 질문은 철저히 '죽음'을 전제로 한 질문입니다. 죽음이 생명을 갉아먹는 세상에서는 '소유'만이
살길처럼 보입니다.
내 핏줄을 남겨야 하기에 자식에 집착하고, 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배우자를 독점하려 합니다. 이것이 세속과 육신의 욕망이 만드는 '지상의 혼인'입니다.
지상의 혼인은 거룩하지만, 죽음의 공포 앞에서 때로는 서로를 옥죄는 소유의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선언하십니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다."(루카 20,36)
죽음이 사라진 곳, 부활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내 것'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멈춘 그 자리에서 비로소 '천국의 혼인'이 시작됩니다.
그것은 배타적인 소유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투명하게 만나는 '친교(Communio)'입니다.
이 '천국의 관계'가 얼마나 뜨겁고 아름다운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미 이 땅에서 보여주었습니다.
규칙을 넘어선 사랑의 폭풍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 베네딕토 성인과 그의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 성녀의 마지막 만남을 기억해 보십시오.
1년에 단 한 번 만나던 어느 날, 해가 저물자
베네딕토 성인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누이여, 이제 가야겠소.
수도원 규칙상 밤에는 밖에서 머물 수 없소." 하지만 죽음을 예감했던 스콜라스티카는 오빠를 붙잡았습니다.
"오빠, 제발 오늘 밤은 가지 마세요. 밤새도록 천상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해요."
오빠가 완강히 거절하자, 그녀는 식탁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져, 베네딕토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황한 오빠가 "누이여,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길!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요?"라고 묻자, 그녀는 평화롭게 웃으며 답했습니다.
"오빠는 제 청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습니다.
자, 나가실 수 있으면 나가보세요."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이 장면을 두고 "사랑할 줄 아는 이가 더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날 밤, 두 남매 사이에는 남녀의 정욕이나 율법의 경직됨은 없었습니다.
오직 두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엮이는 거룩한 친교만이 폭풍우처럼 몰아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넘어선 천국의 관계입니다.
타오르되 소멸하지 않는 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성녀 클라라의 일화는 또 어떻습니까?
어느 날 프란치스코가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포르치운쿨라) 숲속에서 클라라와 소박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두 성인이 성령에 취해 하느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인근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물동이를 들고 달려왔습니다.
성당과 숲 전체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때 불은 없었습니다. 오직 두 성인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에 잠겨 있을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본 것은 물질을 태워 없애는 파괴적인 불이 아니라, 두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하나 될 때 뿜어내는 성령의 불꽃이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서로를 소유하려다 태워버리지만, 부활의 사랑은 서로를 살리며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왜 부활을 믿어야 합니까?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사랑은 결국 무덤에서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잊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우리는 희망을 가집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소유의 껍질을 벗고 '진정한 만남'으로 들어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예고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서로를 소유하지 않고 완전히 내어주며 하나 되시듯, 우리도 이 교회 안에서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깊은 영적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내 사람, 저 사람은 남"이라고 가르는 세상의 배타적인 벽을 허무십시오.
라스콜니코프와 소냐가 죄의 사슬을 끊고 부활의 아침을 맞이했듯, 베네딕토와 스콜라스티카가
밤새도록 천국의 기쁨을 나누었듯, 우리도 서로에게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곁에 있는 이를 바라보십시오.
그는 내가 소유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장차 부활하여 천사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할,
영원히 빛나는 나의 형제요, 나의 자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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