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주보

수원주보

Home

게시판 > 보기

오늘의 묵상

11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1-26 조회수 : 188

루카 21,12-19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습니다 : 배교자의 비참함 

 

 

서기 320년, 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 황제 치하의 춥고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튀르키예의 세바스테(Sebaste)라는 곳에 주둔하던 로마의 최정예 부대, '제12군단' 병사들 중 마흔 명이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로 내몰렸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발가벗겨진 채 살을 에는 혹한 속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호수의 얼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살을 파고드는 추위는 뼈 속까지 사무쳤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갔고, 몸은 제어할 수 없이 떨렸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희 마흔 명이 경기장에 들어왔으니, 마흔 명 모두가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해주소서." 

 

그런데, 그들을 고문하던 총독 아그리콜라는 아주 잔인한 유혹을 준비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바로 옆, 눈에 빤히 보이는 곳에 ‘뜨거운 물이 펄펄 끓는 목욕탕’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그 목욕탕 문틈으로만 따뜻하고 붉은 불빛과 하얀 김이 새어

나왔습니다.

"누구든지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만 하면, 지금 당장 저 따뜻한 물에 들어갈 수 있다!" 

 

살을 찢는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결국 한 병사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기도를 뒤로한 채, "나는 예수를 모른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호수를

뛰쳐나갔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토록 원하던 따뜻한 목욕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행복을 찾았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극한의 추위에 얼어있던 혈관이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려 심장마비가 온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피하려다 육신의 생명도 잃었고, 잠시의 안락을 탐하다가 영원한 영혼의 생명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를 기다린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가장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반면, 끝까지 호수에 남아 추위를 견딘 39명에게는 하늘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천사들이 내려와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교자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경비병 하나가 그 광경에 감화되어, "나도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외치며 옷을 벗고 그 빈자리를 채우러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기어이 40명의 숫자를 채워 순교의 월계관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다가 배교하면 처음부터 안 믿던 이들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추운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는 박해가 두려워 신앙을 타협한 '호세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는 사제로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사제들을 처형하자, 신부는 살기 위해 정부가 시키는 대로 결혼을 하고 사제직을 버립니다.

그는 연금을 받으며 안전한 집에서 배불리 먹고

삽니다.

불신자의 눈에는 '운 좋은 생존자'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알았던 그에게 그 삶은 지옥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를 "호세 신부님!" 하고 부르며

조롱했고, 아내는 그를 경멸했습니다.

어느 날 밤, 숨어 지내던 동료 사제가 잡혀가며 고해성사를 청했을 때, 호세는 아내의 "가지 마요!"라는 호통에 겁을 먹고 나가지 못합니다.

그는 안전한 방구석에서 홀로 울며 기도합니다.

"하느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난 뒤에 그분을 배신하고 사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려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 고통까지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등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2베드 2,21). 

 

아예 하느님을 몰랐다면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잠시나마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의 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빛을 본 사람에게 어둠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입니다.

신앙인이 박해나 고통이 힘들다고 해서 세상으로 도망치면,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영혼의 질식'입니다. 

 

가리옷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스승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배에서 뛰어내려 '은돈 30냥'이라는 구명조끼를 챙겼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3년 동안의 허송세월을 보상받은 현명한 처세술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불에 덴 듯 괴로웠고, 결국 그 돈을 성전에 내동댕이치고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신앙인이 뒤로 물러서면 갈 곳은 지옥뿐입니다. 되돌아갈 다리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앞으로 나아가는 인내'뿐입니다.

고통과 박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기적은 시작됩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지만, 56세에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았습니다.

오페라 사업은 파산했고, 빚쟁이들은 감옥에 넣겠다고 위협했으며, 뇌졸중으로 반신마비까지 왔습니다.

그는 도망치거나 신을 저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구덩이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며 오직 성경 말씀과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음표 하나하나에 쏟아부었습니다.

24일 후, 그가 작곡을 마쳤을 때 하녀는 그가 눈물 범벅이 되어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앞에 하늘이 열리고 위대하신 하느님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찬양인 『메시아』 중 '할렐루야'입니다.

헨델이 파산과 질병이라는 박해를 피했다면, 그는 그저 빚쟁이에 쫓기는 노인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신앙으로 그 자리를 지켰기에(인내), 그는 천상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억울한 오해를 받거나, 손해를 보거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때 마귀는 속삭입니다.

"그만두면 편해져. 적당히 타협해. 저 따뜻한 목욕물(세상)로 돌아가." 

 

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신앙을 버리고 얻은 평화는 호세 신부의 비참함이요, 유다의 밧줄일 뿐입니다.

이미 빛을 본 여러분에게 세상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죽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지금 겪는 이 시련을 뚫고 나가십시오.

헨델처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스테파노처럼 박해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때, 그곳은 우리를 죽이는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가 될 것입니다.

인내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아멘.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