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8,5-11
말씀만으로? 마귀도 성경박사였습니다
1858년, 프랑스 루르드의 본당 신부였던 페라마일 신부는 거구에 천둥 같은 목소리를 가진, 율법과 교회법에 정통한 엄격한 사제였습니다.
반면 그 앞에 서 있는 14살 소녀 베르나데트는
천식으로 숨을 헐떡였고, 글을 읽을 줄도 몰랐으며, 교리 반에서 낙제한 둔재였습니다.
신부는 소녀를 다그쳤습니다.
"이 거짓말쟁이야! 그 부인이 너에게 진흙탕 물을 마시라고 했다고?
짐승처럼 풀을 뜯어 먹으라고 했다고?
하느님은 질서의 하느님이시다.
그런 비이성적인 명령을 내리실 리가 없어!" 신부의 책상 위에는 수많은 신학 서적과 법전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는 그 방대한 '지식'으로 소녀의 체험을 난도질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는 신학적으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지 그 부인이 "가서 씻으라"고 했기에
흙탕물을 파서 얼굴에 발랐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기에 무릎이 까지도록 기도했을 뿐입니다.
그녀에게는 지식이 아니라 '순종'만 있었습니다.
3월 25일, 부인이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 때, 베르나데트는 그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주문처럼 되뇌며 사제관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부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원죄 없는 잉태다(Immaculate Conception)'라고요!"
그 순간, 거인 같던 페라마일 신부는 감전된 듯 얼어붙었습니다.
'원죄 없는 잉태'. 그것은 불과 4년 전 교황 비오 9세가 반포한, 라틴어를 모르는 무식한 시골 소녀는 결코 알 수 없는 최신 교리 용어였습니다.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느냐?"
소녀는 고개를 저으며 맑은 눈으로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교리를 아시지만, 저는 그분을 압니다. 그분은 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고, 저는 그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날, 신학 박사였던 신부는 무릎을 꿇고 울었습니다.
그가 책상 위에서 수십 년간 연구했던 하느님은
침묵하셨지만, 글도 모르는 소녀가 진흙탕 속에서 '순종'으로 파낸 샘물은 기적이 되어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흔히 "성경을 많이 알면 믿음이 좋아진다"고 착각합니다.
개신교 형제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치며 말씀 연구에 몰두하고, 우리 가톨릭 신자들도 성경 공부 수료증이 믿음의 보증수표인 양 여깁니다.
물론 말씀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아는 것'과 그분을 '믿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할 때 사탄을 보십시오. 그는 시편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며 예수님과
논쟁했습니다.
사탄은 성경 박사였습니다.
그러나 사탄에게는 결정적인 하나가 없었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말씀은 알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을 실천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성경 지식만 있고 순종이 없는 신앙은, 자칫하면 마귀의 신앙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여기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만난 증인들이 있습니다.
투르의 성 마르티노를 보십시오.
그는 아직 세례도 받지 않은 예비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벌거벗은 거지를 보았을 때, 교리를 따지는 대신 자신의 붉은 망토를 반으로 잘라 덮어주었습니다.
그 사랑의 순종을 행한 날 밤, 그는 꿈속에서 자신이 덮어준 망토를 입으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공부해서 예수님을 안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천주의 성 요한(John of God)은 거리의 병자들을 자신의 등에 업어 날랐습니다.
어느 날 밤, 위독한 환자를 업고 가는데 너무 무거워 쓰러질 뻔했습니다.
그때 환자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빛나는 얼굴로 변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요한아, 네가 나를 업어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너를 업어주겠다." 그는 환자들의 고름을 닦아주는 손끝에서, 책상머리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모두 이런 식입니다.
말씀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말씀만 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는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명령에 죽고 사는 '순종의 세계'를 몸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저도 상관 밑에 있고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그는 자신이 황제의 권위에 순종할 때 자신에게도 권위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하느님의 권위에 절대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단박에 알아본 것입니다.
순종해 본 사람만이 권위를 알아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부의 경험으로는 고기가 없었지만,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라며 자기 생각을 꺾고 순종했을 때, 그물이 찢어질 듯한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연회장은 몰랐지만, 말씀대로 물을 떠다 나른 하인들은 그 기적의 출처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종종 "믿음이 부족해서 실천을 못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순서가 틀렸습니다.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백 번 통독해도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울리는 징과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도로시 데이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 빵을 나눔으로써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빵을 나누는 순종을 할 때 비로소 빵이신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나병 환자가 끔찍하게 싫었지만, 그들을 껴안으라는 내면의 소리에 순종하여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쓴맛이 단맛으로 변했다"고 고백합니다.
혐오를 이기고 순종했을 때, 그는 나병 환자 안에서 달콤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성경 공부를 더 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사랑의 실천을 하나 정하십시오.
내 자존심을 꺾고 배우자에게 사과하는 순종, 내 시간을 쪼개어 힘든 이를 돕는 순종.
그 순종의 현장에서 여러분은 베르나데트처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복잡한 신학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사랑을 실천했을 때 그분이 제 곁에 계시다는 것을 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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