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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2-08 조회수 : 184

루카 1,26-38 
 
성모께서 원죄 없음을 믿지 않으셨으면, 예수님을 잉태하실 수 없으셨다  
 
 
[도입] 야수는 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없다 (양심의 장벽)
우리가 잘 아는 동화 『미녀와 야수』에는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흉측한 야수는 아름다운 벨을 사랑하지만, 그녀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단순히 거절당할까 봐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벨 앞에 서면,
짐승 같은 자신의 추악함이 극명하게 비교되어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야수는 괴로워하며 어둠 속으로 숨습니다. "당신은 너무 빛나고 나는 너무 더럽소. 야수는 미녀의 방에 들어갈 수 없소."
이것이 바로 '양심'의 작용입니다.
더러운 것은 본능적으로 깨끗한 것을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더럽다고 느끼는 한, 거룩한 분이 내게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어도 내 양심이 "너는 자격이 없어!"라고 소리치며 문을 걸어 잠그기 때문입니다. 
 
[전개 1] 거룩함 앞에서 뒷걸음질 치는 인간
성경을 보십시오.
하느님의 거룩함을 체험한 인간의 첫 반응은 언제나 '뒷걸음질'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를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순간, 거룩하신 하느님을 밀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이 하느님을 품는다는 것은 불에 타죽는 것과 같은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을 자신의 태중에 모시겠다고 '예'라고 대답할 수 있었을까?" 
 
만약 마리아가 자신의 영혼에 아주 작은 죄의 얼룩이라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혹은 자신을 그저 평범한 죄인이라고 여겼다면, 베드로처럼 이렇게 외쳤어야 마땅합니다.
"주님, 저를 떠나십시오! 감히 누추한 제 몸에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모실 수 없습니다.
이는 신성모독입니다!" 
 
[전개 2] 믿음은 "내가 누구인가?"에 답하는 것
하지만 마리아는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가 교만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통해 자신의 '원죄 없음'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여(Kecharitomene)"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너는 죄가 하나도 없이 은총으로만 꽉 차 있다"라는 하느님의 선언입니다.
성경은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였다"고 전합니다.
이 침묵의 시간 동안 마리아의 내면에서는 치열한 식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나는 연약한 인간인데, 하느님께서 나를 완전한 은총 덩어리라고 부르시는구나.
죄가 없다고 하시는구나.' 
 
마리아는 자신의 감정이나 인간적인 판단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더 신뢰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깨끗하다고 하시면, 나는 깨끗한 것이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마리아는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 없이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며
거룩하신 분을 자신의 태중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믿음은 하느님이 바라보시는 대로 '내가 누구인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신이 '원죄 없는 깨끗한 그릇'임을 믿으셨기에, 예수님을 담아내는 구원의 도구가 되셨습니다.
자신이 깨끗함을 믿지 못하면, 결코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전개 3] 향심기도: 나를 규정하는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는 연습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성체성사를 통해 매일 예수님을 모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신을 '죄인', '부족한 사람',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규정하며 살아갑니다.
내 안의 죄의식(야수)이 하느님(미녀)을 온전히 모시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의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를 선택하는 훈련, 바로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입니다.
향심기도는 우리가 성모님처럼 "나는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다"라는 믿음을 연습하는 가장 좋은 기도입니다. 
 
방법은 단순합니다.
첫째, 하느님 안에서의 내 정체성을 담은 '거룩한 단어'를 하나 정하십시오.
'예수', '사랑', '거룩함', '현존' 등입니다.
이 단어는 "나는 당신을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라는 내 믿음의 동의입니다. 
 
둘째, 기도를 시작하면 온갖 잡념과 부정적인 생각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이기적이야.", "네가 무슨 기도를 해." 이런 생각들이 뱀처럼 우리를 유혹합니다.
이때 그 생각들과 싸우거나 대화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셋째, 그저 부드럽게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십시오.
생각을 끊고 거룩한 단어를 떠올리는 행위는 이런 고백과 같습니다.
"아니야, 내 느낌은 중요하지 않아.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했어.
하느님이 내 안에 사신다고 했어.
나는 주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야."
이것이 성모님이 천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신 과정과 같습니다.
수많은 인간적인 두려움을 뒤로하고, 천사가 전해준 '은총이 가득한 이'라는 정체성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결론] 내가 믿는 대로 주님을 모시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신을 더러운 그릇이라 믿는 사람은 평생 주님을 문밖에 세워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자신이 주님을 담기에 합당한(물론 은총으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을 잉태하고 낳게 됩니다. 
 
우리가 향심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으로 돌아가는 노력은, 단순히 마음을 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 당신께서 저를 깨끗하다고 하시니, 저는 깨끗합니다.
그러니 제 안에 오십시오."라고 고백하며 문을 여는 행위입니다. 
 
오늘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헛된 겸손으로 뒷걸음질 치지 맙시다.
대신 하느님이 주신 거룩한 존엄성을 믿고, 내 안의 가장 깊은 방을 활짝 열어젖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됩시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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