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 21,23-27: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대림 시기는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빛을 선택할 것인지, 어둠에 머물 것인지 늘 물음 앞에 서 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23절) 묻는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진리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반문하심으로써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의심한다. 기적과 말씀을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5절) 되물으신다. 만약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거부한 책임을 인정해야 하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들의 분노를 감당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모르겠다”라고 회피한다. 그들의 답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불신앙과 두려움의 결과였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닫혀 있었고, 그러한 마음에는 진리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해석한다. “그들은 빛이 앞에 있었으나 스스로 눈을 감았다. 문제는 알지 못함이 아니라, 알기를 원치 않음이다.”(Hom. in Matth. 68,3) 신앙은 논리보다 겸손히 마음을 여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의 질문을 단순한 논박이 아니라 자비의 행위로 이해한다. “주님은 그들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불신앙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In Io. Tract. 2) 하느님은 언제나 심판보다 회개로 우리를 이끌고자 하신다. 오리게네스는 요한과 예수님의 권위를 연결한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고백하지 않는 자는, 하늘에서 오신 그리스도의 권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Comm. in Matth. XIII,19) 요한을 거부한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바리사이들처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진리를 회피하지 않고,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증언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대림 시기 우리는 “예수님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고백을 새롭게 해야 한다. 그 권위는 세상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의 친밀한 일치와 사랑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이란 단순히 기적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며 따르는 사람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림의 기다림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바리사이들처럼 “모르겠다.”라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하늘에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닫힌 마음이 아니라 열린 믿음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쁨과 담대함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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