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오 1,18-24
당신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찬미 예수님!
사람의 마음은 결국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살려는 마음'과 '남을 살리려는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우리가 영원히 머물 집을 짓습니다.
먼저 '내가 살려는 마음'이 어떤 집을 짓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예가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입니다.
총기 회사의 상속녀 사라 윈체스터가 지은
이 기괴한 저택은 160개의 방과 열리지 않는 문, 막다른 계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입니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도대체 이 여인이 집 가장 깊은 곳, 겹겹의 자물쇠로 잠긴 금고 속에
무엇을 숨겨두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엄청난 보석을 예상하며 금고를 열었지만,
그 안에는 단 두 가지 물건뿐이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의 머리카락 한 줌과 남편의 부고 기사.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자기 생명의 연장선'이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철통같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과거의 기억과 원혼들로부터 지켜내야 할 '자신의 목숨'뿐이었습니다.
내 목숨, 내 가족, 내 것만을 지키려는 그 마음에는 두려움이 깃들었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빼앗을까 봐 공포에 떨며 지은 집은 결국 누구도 안식할 수 없는 '유령의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은 위 예와는 정반대의 집을 지었습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십니다. 성막은 화려한 금은보화를
보관하는 금고가 아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깊은 지성소, 그 계약의 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적힌 십계명 돌판이었습니다.
즉, 성막은 나를 봉헌하여 내 욕심을 비우고,
그 안에 오직 '사랑의 뜻'만을 남기는 거룩한 집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 성막이었습니다.
약혼녀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요셉은 자신의 명예나 생명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라면 돌을 던져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파렴치한으로 매장당할 것을 각오하고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습니다.
"내 생명을 버려서라도 저 여인을 살리겠다."
이것이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요셉의 처지는 초라하고 냄새나는 '마굿간'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자기를 보호할 벽 하나 없는 허술한 인생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오직 '사람을 살리는 마음'밖에 없었기에, 그 초라한 마굿간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성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계약의 궤 위에 하느님의 영광이 구름처럼 내렸듯이, 요셉의 그 착한 뜻 위에 아기 예수님께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지은 윈체스터의 집은 유령의 소굴이 되었지만, 남을 살리려 지은 요셉의 마굿간은 구세주의 성막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이런 성막을 지은 분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투아니아의 일본 영사 대리였던 스기하라 지우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으며, 세례명은 '바오로(Pavel)'였습니다.
1940년 7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유다인 수천 명이 영사관으로 몰려왔을 때, 본국에서는 비자 발급을 거부했습니다.
스기하라 바오로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본국의 명령을 따르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파라오의 길, 아니면 자신의 경력과 목숨을 걸고
타인을 살리는 이스라엘의 길.
그는 밤새 고뇌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교적 양심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정부의 명령을 어겼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약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다면, 나는 하느님을 거역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해고당할 것을 각오하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밤낮없이 비자를 써내려가 6,0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는 외교관직을 박탈당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형광등을 팔러 다니며 평생을 가난과 침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은 집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지은 거대한 '생명의 방주'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분이 계시지요. 1985년 남중국해에서 표류하던 보트 피플 96명을 구한
전재용 선장입니다.
당시 회사의 지침은 "엮이면 골치 아프니 무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선장은 나쁜 지향(무시) 대신 양심(착한 지향)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난민들을 모두 구조했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해고당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훗날 자신이 구한 생명들과 재회하며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지은 집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96명의 생명이 숨 쉬는 사랑의 성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성막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거룩한 집은 하루아침에 뚝딱 지어지지 않습니다.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1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어지고 있듯이, 우리의 마음 성전도 매일의 선택을 통해 아주 오랫동안 지어지는 것입니다.
체로키 인디언의 지혜처럼, 우리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습니다.
'나만 살려는 이기심의 늑대'와 '남을 살리려는 사랑의 늑대'입니다.
매일 아침, 매 순간의 선택 앞에서 내가 어느 늑대에게 먹이(지향)를 주느냐에 따라 내 집의 모양이 결정됩니다.
내가 살려는 먹이를 주면 유령의 집이 완성될 것이고, 남을 살리려는 먹이를 주면 주님이 거처하시는 성막이 완성될 것입니다.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나의 욕심을 채우는 금고입니까, 아니면 이웃을 품는 빈방입니까?
사라 윈체스터의 두려움을 버리고, 요셉의 마굿간을 선택하십시오.
나를 버려 너를 살리는 그 착한 뜻 안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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