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Nothing)에 앉아 있어야 별(Everything)이 보입니다
찬미 예수님!
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면 아주 오만한 천재 외과의사 스티븐 스트레인지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자신의 손이 곧 신의 손이라 믿었습니다. "나는 죽음을 통제한다." 그는 오만했고, 당연히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곧 빛이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빗길 교통사고로 양손의 신경이 완전히 끊어집니다.
전 재산을 털어 수술해도 고칠 수 없게 되자 그는 폐인이 됩니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에인션트 원이라는 스승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그를 눈보라 치는 에베레스트산 한복판에 덜컥 버려두고 떠납니다.
죽음의 공포, 철저한 고립,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그 절체절명의 순간 스승은 말합니다.
"너에 대한 것이 아니다(It's not about you)."
그가 자신의 자아(Ego)를 내려놓고 항복했을 때, 비로소 마법의 힘(은총)이 그에게 들어왔습니다.
그는 손을 잃음으로써(Nothing), 세상을 구하는 소서러(Everything)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가 부르는 노래, '베네딕투스'는 바로 이 과정을 겪은 자만이 부를 수 있는 찬가입니다.
즈카르야는 사제였습니다.
평생 하느님을 섬겼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계산기를 두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를 '벙어리'로 만드셨습니다.
열 달 동안의 침묵, 그것은 즈카르야의 자아를 깨뜨리는 에베레스트산이었습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이 주인이라는 착각을 잃고 'Nothing'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의 눈에 "떠오르는 별"이신 구세주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빛인 줄 착각하는 이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언가 선택하고 할 능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바로 이런 이들을 'Nothing'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어둠 속에 앉히는 것, 그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미국의 변호사 호레이쇼 스패포드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시카고 대화재로 전 재산을 잃고, 설상가상으로 네 딸을 배 사고로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딸들이 수장된 대서양 한가운데를 지나가게
됩니다.
인생 최악의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실에서 절규하던 그에게 갑자기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밀려왔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펜을 들어 찬송가를 썼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내 영혼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 가장 깊은 슬픔의 어둠 속에서 그는 부활의 소망이라는
가장 밝은 빛을 보았습니다.
칠레 광부 매몰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하 700미터, 빛 한 줄기 없는 갱도에 33명의 광부가 69일간 매몰되었습니다.
섭씨 32도의 무더위와 암흑 속에서 그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모여 기도를 드렸습니다.
구조된 후 작업반장 우르주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우리 33명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34번째 인물이 우리와 함께 있었습니다.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지상의 빛이 사라진 지하 700미터의 절대 어둠 속에서 그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임마누엘)을 만났습니다.
왜 우리는 어둠 속에 앉아야 할까요?
천문학자들은 별을 관측하기 위해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같은 오지로 떠납니다.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 즉 '광공해(Light Pollution)'가 있는 곳에서는 은하수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성공, 칭찬, 자만심이라는 인공조명이 너무 밝게 켜져 있으면, 베들레헴의 작은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어둠 속에 앉혀 이 광공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스스로 빛나기를 멈추고 자신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 사람(사막)만이 구세주를 발견합니다.
아일랜드의 사도 성 파트리치오(패트릭)도 이 과정을 겪었습니다.
16살의 귀족 소년이었던 그는 해적에게 납치되어 노예가 됩니다.
6년 동안 낯선 땅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양을 치는 고독 속에 버려졌습니다.
부모의 품을 떠난 끔찍한 어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백록에서 말합니다.
"그 고독 속에서 나는 하루에 백 번도 넘게 기도했다.
그러자 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불타올랐다." 그 6년의 광야 생활이 그를 'Nothing'으로 만들었기에, 그는 아일랜드 전체를 비추는 '빛'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제로(0)'로 만드는 예언자를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닭 울음소리'가 바로 그 예언자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지킬 수 있는 빛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모두가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었을 때, 그리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자만심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리 있는 수제자가 아니라, 겁쟁이 배신자, 철저한 'Nothing'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무(無)의 체험 후, 베드로는 통곡의 기도를 바쳤고 진짜 반석이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에게는 엘리사 예언자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아람의 군사령관 나아만은 자신의 지위와 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병을 고치러 갈 때도 막대한 보물과 왕의 친서를 들고 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Something)'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에게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합니다.
흙탕물에 들어가라는 명령은 장군의 계급장을 떼고 벌거벗은 나병 환자(Nothing)가 되라는 굴욕적인 요구였습니다.
그가 자존심을 꺾고 물속에 들어갔을 때, 그의 살은 어린아이처럼 깨끗해졌습니다.
그는 비로소 "이스라엘의 하느님 외에는 신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를 제로로 만드는 예언자를 만나야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 예언자는 바로 '교회'입니다. 제가 지금 냉담자를 무작정 방문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낮아짐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모든 예절과 가르침, 고해성사와 전례는 우리 자신을 제로로 만듭니다.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제 탓이오"를 고백하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치켜세우지만, 교회는 우리를 죄인이라 부르며 어둠 속에 앉힙니다.
기분 나빠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메시아의 빛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이 되었다고 착각하지 말고, 하루에도 백 번이라도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존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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