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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6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2-26 조회수 : 133

사도행전 6,8-10; 7,54-59   마태오 10,17-22 
 
관상은 과학입니다  
 
 
찬미 예수님!
어제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흰색 제의를 입고 축제를 벌였는데, 하루 만에 붉은색 제의를 입고 장례식을 치르는 기분입니다.
교회는 성탄 바로 다음 날, 가장 처참하게 돌에 맞아 죽은 스테파노의 순교를 기념합니다.
이것은 성탄의 완성이 낭만이 아니라, 생명을 바치는 사랑임을 보여줍니다. 
 
오늘은 조금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관상은 과학이다"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꽤 일리가 있습니다.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한번은 참모가 내각 각료로 아주 유능한 인재를 추천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은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얼굴이 마음에 안 드네."
참모가 황당해하며 "아니, 얼굴은 타고나는 것인데 본인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하자, 링컨은 정색하며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네. 뱃속에서 나올 때는 부모 탓이지만,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하네.
그 사람이 평생 마음에 무엇을 품고 살았는지가 얼굴 근육 하나하나에 다 기록되기 때문이지." 
 
링컨의 말처럼, 얼굴은 그저 피부가 아닙니다. 영혼의 이력서이자, 내 마음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생중계하는 '모니터'입니다.
탐욕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탐욕스러운 주름이 잡히고, 사랑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온화한 미소가 번집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스테파노를 죽이려고 둘러싼 의회 의원들은 '격분'하여 이를 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땅의 돌멩이'와 '미움'에 고정되어 있었기에, 그 얼굴은 악마처럼 일그러져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똑같은 현장에 있었던 스테파노의 얼굴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 6,15) 
 
도대체 어떻게 날아오는 돌무더기 앞에서 천사의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요?
스테파노가 강철 멘탈을 가져서가 아닙니다.
그의 시선이 땅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사도 7,55) 
 
그때 스테파노가 본 것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보통 신경(Credo)에서는 예수님이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왜 스테파노의 눈에는 '서 계신' 것으로 보였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녀가 배에서 떨어져 허우적대고 있는데, 점잖게 앉아 있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벌떡 일어나서 뛰어들 준비를 하거나, 밧줄을 던지며 "조금만 버텨라, 내가 여기 있다!"라고 소리치지 않겠습니까? 
 
스테파노는 자신을 응원하고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신 스승님의 안타까운 사랑을 본 것입니다.
그 사랑의 눈빛을 마주 보는 순간, 날아오는 돌멩이는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심리학에서도 이와 똑같은 원리를 증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엘리너 깁슨의 '시각 벼랑(Visual Cliff)' 실험입니다.
아기 앞에 낭떠러지처럼 보이는 투명한 유리 판을 설치해 둡니다.
아기는 건너편으로 가고 싶지만, 발밑이 낭떠러지처럼 보여 공포를 느낍니다.
이때 아기는 본능적으로 건너편에 있는 엄마의 얼굴을 쳐다봅니다.
만약 엄마가 '공포'나 '불안'의 표정을 지으면,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며 뒤로 물러납니다.
하지만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미소'를 지으면, 아기는 그 낭떠러지를 씩씩하게 기어서 건너갑니다. 
 
아기에게 세상(벼랑)은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엄마의 얼굴(모니터)에 비친 감정이 곧 아기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스테파노가 죽음의 벼랑 앞에서도 평화로웠던 건, 그가 바라본 예수님의 얼굴이 자신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짓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그 어떤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빼앗길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세상이라는 벼랑 끝에 몰릴수록 주님의 미소를 더 선명하게 보기에 그 평화는 더욱 커집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을 기억하십니까?
탈주자가 생겨 그 벌로 10명이 굶어 죽어야 하는 지하 감방. 그곳은 비명과 저주가 가득한 생지옥이었습니다.
하지만 콜베 신부님이 들어가자 그곳은 기도와 찬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성당으로 변했습니다.
2주 뒤 시신을 수습하러 들어간 사람은 콜베 신부님의 얼굴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굶어 죽은 시신인데도 너무나 평온하고 빛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죄수들은 '굶주림'과 '나치'를 보았기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콜베 신부님은 감방 벽 너머의 '하느님 나라'와 '원죄 없으신 성모님'을 보고 있었기에 천사의 얼굴이 출력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얼굴'을 보고 하느님을
믿을지 말지 결정합니다.
찌푸리고, 화내고,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방해입니다.
우리의 표정이 곧 복음 선포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도 스테파노처럼 천사의 얼굴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억지로 거울 보고 웃는 연습을 한다고 될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웃는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의 어린 시절 일화가 우리에게 그 답을 줍니다.
어린 시절 데레사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았습니다. 약도 소용없었고, 데레사는 극심한 우울과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어느 날 데레사는 침대 곁에 있는 성모상을 간절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모상이 살아있는 것처럼 환하게 빛나며 어린 데레사를 향해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인 것입니다. 
 
훗날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성모님의 그 황홀한 미소가 내 영혼 깊숙이 들어오자마자, 모든 고통은 사라지고 두 뺨에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데레사가 '작은 꽃'처럼 예쁜 얼굴의 성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병상에서 성모님의 미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떤 하느님의 얼굴을 상상합니까?
혹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나를 노려보거나, 벌을 주려고 벼르는 무서운 얼굴을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책감은 우리 눈을 가려 하느님을 심판관으로 보게 만듭니다.
두려운 얼굴을 보면 우리 얼굴도 두려움으로 어두워집니다. 
 
하지만 스테파노처럼, 그리고 어린 데레사처럼 죄가 없는 순수한 마음, 혹은 용서받은 자녀의 마음으로 눈을 들면, 우리는 우리를 향해 활짝 웃고 계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오늘 하루, 내 영혼의 거울을 닦으십시오. 고해성사로 죄의 얼룩을 지우고, 미사 안에서 나를 보며 기뻐하시는 주님의 미소를 자주 바라보십시오. 
 
아기가 엄마의 미소를 보며 웃는 법을 배우듯, 우리도 주님의 미소를 자주 볼 때 비로소 세상이 감당 못 할 평온하고 행복한 천사의 얼굴을 갖게 될 것입니다.
관상은 과학입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계시는 그분의 미소를 바라보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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