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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2-27 조회수 : 80

요한1서 1,1-4  요한 20,2-8 
 
나는 누구의 기쁨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는가? 
 
 
찬미 예수님!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본능일까요, 아니면 학습된 것일까요?
우리는 당연히 타고난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 톰과 제리만 봐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1930년대 심리학자 징양 쿠오(Zing-Yang Kuo)는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지요.
A그룹은 어미가 쥐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자라게 했고, B그룹은 쥐와 한집에서 친구처럼 자라게 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사냥을 보고 자란 A그룹은 85%가 쥐를 사냥했지만, 쥐와 함께 자란 B그룹은 쥐를 사냥하지 않았고 심지어 쥐를 무서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다"는 것은 피에 새겨진 본능이 아니라, 어미를 보고 배운 '문화'였던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 기술은 철저한 조기 교육의 결과입니다. 
 
사막의 파수꾼 미어캣을 보십시오.
그들은 독이 있는 전갈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새끼가 처음부터 전갈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미는 단계적으로 가르칩니다. 
처음에는 죽은 전갈을 주고, 다음에는 독침을 뺀 산 전갈을 주고, 마지막에는 독침이 있는 전갈을 주되 옆에서 지켜봅니다.
이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끼는 야생에서 전갈을 건드렸다가 쏘여 죽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생존하는 법을 보여주는 교과서입니다.
보여주지 않으면, 자녀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생존뿐만이 아닙니다.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법도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의 그 유명하고도 슬픈 '원숭이 실험'을 아실 겁니다.
그는 갓 태어난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놓고, 우유가 나오는 차가운 철사 어미와 우유는 없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어미 인형을 넣어주었습니다.
아기 원숭이는 배고플 때만 잠시 철사 어미에게 가고, 나머지 시간은 온종일 천 어미에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따뜻한 접촉, 즉 사랑에 대한 갈구가 식욕보다 컸던 것이지요. 
 
하지만 진짜 비극은 그다음입니다.
이렇게 모조품 어미 밑에서 자란 원숭이들은 나중에 무리에 넣어주어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짝짓기도 거부했으며, 억지로 새끼를 낳게 해도 자기 새끼를 돌보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의 모델이 부재한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의 절규가 바로 이 지옥을 보여줍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피조물은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숲속에서 행복한 가족을 훔쳐보며 사랑을 배우고 싶어 했고,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에게 사랑받기를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박사는 흉측한 그를 혐오하며 버렸습니다. 사랑의 모델을 상실한 괴물은 결국 잔혹한 살인귀가 되어 창조주에게 소리칩니다.
"나는 뼛속까지 외롭다.
나의 창조주여,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
그러면 나도 다시 선하게 될 것이다."
괴물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보고 배울 사랑의 원본이 없었기에, 그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행복은 사랑과 관계에서 옵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려면 더 사랑해야 하는데, 만약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사랑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와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나 또한 기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의 '보보 인형 실험'은 인간이 얼마나 철저한 모방의 존재인지를 증명합니다.
어른이 인형을 발로 차고 때리는 영상을 본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똑같이 인형을 폭행했습니다.
반대로 어른이 인형을 안아주는 것을 본 아이들은 인형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내가 보여주는 대로 상대방은 배웁니다.
내가 사랑의 원형을 보여주어야만 상대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사도는 바로 이 원리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라는 완벽한 사랑의 모델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나누시는 그 완벽한 삼위일체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벅차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혼자만 알고 있으려니 기쁨이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웃들이 그 사랑을 몰라주면 요한과 진정한 친교를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편지를 씁니다.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Koinonia)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3-4) 
 
요한이 사랑을 가르치려 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내가 본 그 사랑의 원본을 너희에게도 보여줄게.
너희도 이것을 보고 배워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그래야 우리가 서로 삼위일체처럼 사랑하며 내 기쁨도, 너의 기쁨도 꽉 차게 될 테니까." 
 
상대방을 사랑의 기술자로 만들지 않으면, 나도 그와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없어 외로워집니다.
기쁘려면,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그리고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교과서는 무엇입니까? 
 
요한 복음 13장, 최후의 만찬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신 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Model)'을 보여 준 것이다." 
 
말씀만 하신 게 아닙니다.
행동으로, 살과 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으셨기에,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발 씻겨주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요한은 그날 밤 그 수건과 대야를 보았고,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는 스승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자녀에게, 이웃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미어캣이 전갈 잡는 법을 가르치듯, 우리가 죄의 독에 쏘이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려면 스승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만 챙겨라, 이겨라, 밟아라"는 잘못된 사냥법을 가르칩니다.
그 영상을 보고 자란 사람들은 서로를 적으로 여길 뿐, 결코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오늘 성 요한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의 시선을 세상이라는 TV 화면에서 돌려, 예수님이라는 원본에게 고정합시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 사랑을 배워 누군가의 발을 씻겨줍시다. 
 
내가 사랑을 보여주면, 그도 사랑을 배울 것이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요한 사도가 약속한 '충만한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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