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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1-07 조회수 : 176

[주님 공현 후 수요일] 
 
마르코 6,45-52 
 
당신은 성체를 소화시키십니까, 압도당하십니까?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 호수 한가운데서 죽을 고생을 하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지금 역풍을 만나 노를 저을 힘도 다 빠져버린 탈진 상태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토록 기다리던 스승님이 오셨으니 환호성을 질러야 맞지 않습니까?
"이제 살았다!" 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유령이다!" 하고 비명을 지르며 공포에 휩싸입니다. 
 
불과 몇 시간 전, 그들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 빵은 그저 '배고픔을 해결해 준 맛있는 공짜 밥'이었을 뿐, 그 빵을 만드신 분이
'자연 법칙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까지는 닿지 못했던 것입니다.
빵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봐도 '유령'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겪는 신앙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매일 미사에 와서 성체를 모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생의 배는 여전히 풍랑 속에서 요동칠까요? 왜 성체를 영하고 나서도 뒤돌아서면 불안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질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소화'시키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체를 마치 영양제나 비타민처럼 생각합니다.
"이거 먹으면 좀 힘이 나겠지? 위로가 되겠지?"
성체를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도구 정도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성체를 이용하려 드니, 그 엄청난 하느님의 에너지가 내 안에서 갇혀버립니다. 
 
성체는 그러나 우리가 소화시키는 음식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성체가 우리를 삼키셔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현존 앞에 완전히 '압도(Overwhelmed)'당해야 합니다. 
 
유럽을 제패했던 황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아실 겁니다.
그가 말년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장군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폐하,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은 언제였습니까?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였습니까?
아니면 황제 대관식이었습니까?"
나폴레옹은 잠시 침묵하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의외의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아니네.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날은, 내가 첫 영성체를 하던 날이었네." 
 
세상 모든 나라를 정복했던 황제조차, 그 작고 하얀 빵 조각 앞에서는 무력한 어린아이였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는 알았습니다.
성체는 내가 정복하고 이해하고 소화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정복하러 오신 왕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영성체 순간, 쓰고 있던 나의 왕관을 벗어 놓는 것, 그것이 압도당하는 자의 평화입니다. 
 
이 '압도됨'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또 다른 분이 있습니다.
바로 복자 임멜다 람베르티니입니다.
열한 살 소녀였던 임멜다는 성체를 너무도 갈망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성체가 그녀에게 날아왔고, 사제가 영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성체를 모신 직후, 그 기쁨과 사랑의 무게를 육체가 견디지 못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선종했습니다.
하느님의 실재가 너무 커서, 육신이라는 그릇이 깨져버린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사랑의 죽음'이라 불렀습니다.
죄가 머물 육신조차 남기지 않고 하느님과 하나 된 완전한 평화, 이것이 성체의 위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체 앞에서 이렇게 압도당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비타민 먹듯 성체를 대하는 타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 몇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기습(Ambush)'당할 용기를 내십시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완벽한 무신론자였던 앙드레 프로사르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날 친구를 기다리러 우연히 성당에 들어갔다가 무심코 감실을 보았습니다.
잠시 후 성당을 나온 그는 세상에서 가장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훗날 그가 쓴 책 제목이 『하느님은 계시다, 나는 그분을 만났다』입니다.
그는 어떤 논리적 설득도 없이, 단지 성체 안에 계신 그분의 존재감에 기습당했습니다.
성당에 앉아 계실 때, "주님, 저를 덮치십시오. 저를 기습해 주십시오"라고 청해 보십시오.
무방비 상태로 그분께 노출되는 것, 그것이 평화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둘째, 말씀을 배우십시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낯선 나그네와 식사를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식탁에서 그 나그네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후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손님이 주인(Host)이 되는 순간, 그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우리는 영성체 때 내가 예수님을 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체는 나고 객체는 예수님입니다.
하지만 압도당하려면 주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뜨겁게
듣지 않았다면 그분의 실체를 볼 수 있었을까요? 성체는 말씀이시기도 합니다.  
 
셋째, 분석하지 말고 그냥 바라보십시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이 사목하던 아르스 본당에, 매일 성당 맨 뒷자리에 앉아 감실만
쳐다보는 늙은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묵주도, 기도서도 없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하루 종일 거기 앉아서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합니다. 그냥 저는 그분을 쳐다보고, 그분은 저를 쳐다봅니다
(I look at Him, and He looks at me). 그거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성체 앞에서도 너무 말이 많습니다. 분석하고, 청하고, 따집니다.
압도당한다는 것은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그저 그분의 시선에 내 시선을 맞추는 것, 그 '눈맞춤' 속에 모든 평화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성체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히 제일 좋지만, 성체가 없어도 할 수 있습니다.
성체는 언제나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주 그분을 인식하려고 하면 됩니다. 성체께 드리는 짧은 기도를 정해서 자주 바치십시오.
저는 “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모든 것 안에서 꽃을 발견하게 하소서.”라는 식의
기도를 자주 바치려 합니다. 그러면 언제나 제 안의 예수님 심장이 저를 압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성체에 압도당한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리스트의 제자이자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헤르만 코헨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의 부탁으로 성당 성가대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는 믿음이 없었지만 성체 강복 때 사람들이 무릎을 꿇자 예의상 고개를 숙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성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그를 감전시켰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울었고, 훗날 가르멜 수도회 신부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부족하다면 '몸의 예의'라도 갖추십시오. 정성껏 무릎 꿇고, 두 손을 모으는 그 '형식'이
때로는 내용인 은총을 담는 피뢰침이 되어 하느님의 번개를 맞게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는 성체성사를 묵상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성체가 우리를 먹어치워야 한다." 
 
내가 빵을 소화시켜 내 에너지로 삼으면 나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하지만 성체라는 거대한 불길이 나를 삼켜 태워버리면, 내 안에는 재(Ash)와 예수님만 남습니다.
재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재는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 깨끗함에서 예수님께서 활동하십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성체를 모시러 나오실 때, 비타민을 먹으러 나오지 마십시오.
나를 삼키러 오시는 사자(Lion) 같은 하느님을 만나러 나오십시오.
"주님, 제가 당신을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저를 압도해 주십시오.
당신이 저를 먹어주십시오." 
 
그분이 내 인생의 배에 '하느님'으로 탑승하시는 순간, 여러분을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맞바람은
멈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
그 거룩한 평화 속으로 항해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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