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았다는 말을 듣지 못할까?
찬미 예수님!
주님 공현의 신비 안에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얼굴을 세상에 보여주고 계십니까?
오늘 저는 조금 엉뚱한 상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어느 날, 한 미식가가 소문난 맛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집어 들고는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와, 이 메뉴판의 폰트 좀 봐. 고딕체와 명조체의 조화가 절묘하군.
음식 설명은 또 얼마나 문학적인가!
'새벽이슬을 머금은 유기농 양상추'라니... 재료의 원산지 표시도 아주 훌륭해."
그는 무려 1시간 동안 메뉴판을 정독하고, 분석하고, 심지어 감명 깊은 구절을 노트에 필사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배를 두드립니다.
"아, 배부르다. 정말 훌륭한 식사였어." 하고는 식당을 나가버립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정상으로 보이십니까?
그는 정작 음식은 시키지도 않았고, 한 숟가락도 먹지 않았습니다.
메뉴판은 종이일 뿐, 음식이 아닙니다.
종이를 아무리 씹어 먹어도 배가 부를 리 없지요.
메뉴판을 봤으면 주문을 하고, 음식을 입에 넣고 씹어서 내 피와 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이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꼭 이 '메뉴판을 먹는 미식가'와 같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천국 잔치의 메뉴판입니다.
우리는 성경 공부 시간에 모여 앉아 감탄합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어원이 참 오묘하네요." "바오로 사도의 문체는 정말 논리적이야."
그렇게 연구하고 밑줄 긋고 필사하지만, 정작 그 말씀이 지시하는 '사랑'과 '용서'라는 음식은 주문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영혼은 늘 굶주려 있고,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저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닮지 않았을까?"
한때 우리 가톨릭교회는 김수환 추기경님이 계시던 시절,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존경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 가톨릭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우리 평신도들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만 할 뿐,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순간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묻지 않고, 내 본능대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순이 계속되면 제2의 간디 같은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유학 시절 겪은 일화는 우리에게 뼈아픈 일침을 줍니다.
간디는 성경의 산상수훈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마음까지 먹었습니다.
어느 주일,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한 교회에 들어서려 했습니다.
하지만 입구의 안내원이 그를 막아섰습니다.
"여기는 당신 같은 유색인종이 들어올 곳이 아니오. 딴 데로 가시오."
그 안내원과 교회 안의 백인들은 매주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는 모두 형제다"라는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훌륭한 '대본'이었지만, 그들은 그 대본대로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무대 위에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엉뚱한 연기를 펼친 것입니다.
간디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예수는 좋아합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조금도 닮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본(예수님)은 완벽한데, 배우(신자)가 연기를 엉망으로 하니 관객(세상)이 실망하고 극장을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시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 성경은 연구 대상이 아니라, 당신의 삶으로 성취해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씀 그 자체이셨기에, 말씀대로 사셨고 말씀대로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연기 대본'이 아니라
'연구 논문'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머리는 커졌는데 손발은 움직이지 않는 기형적인 신앙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로데 궁전의 율법 학자들을 보십시오.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유다인의 왕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들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미카 예언서를 인용하며 정답을 맞혔습니다.
"베들레헴입니다!"
그들은 성경 박사들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오실 장소를 정확히 연구해 냈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인간 내비게이션'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먼 길을 온 이방인 동방박사들은 별을 따라 경배하러 떠났지만, 정답을 알고 있던 박사들은 편안한 궁전에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정보'였지, 따라야 할 '지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가장 섬뜩한 사례입니다.
성경은 '구원 교본'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수영에 관한 책을 분석할 시간이 없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육화입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당신 안에 육화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예수님과 한 몸인 분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거창한 신학적 지식은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일화를 기억합시다. 당시 중세 신학자들은 성경에 수많은 주석과 해설을 달며 지식을 뽐냈습니다.
프란치스코회의 한 형제가 성인에게 와서 "저도 시편 주석서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청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습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
우리는 복음을 '주석 없이(Sine Glossa)', 있는 그대로 살아야 한다."
성인에게 성경은 연구해서 지식을 쌓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로 살아내야 할 '삶 그 자체'였습니다.
사막의 교부 성 안토니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성당에 들어갔다가 마태오 복음의 한 구절을 듣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는 그 구절을 노트에 적거나, 집에 가서 묵상하거나, 신학적 의미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즉시' 자기 밭을 팔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수백 번 읽고, 수십 번 강론을 듣고, 성경 공부 시간에 붉은색 펜으로 밑줄을
긋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오처럼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한 구절의 대본을 완벽하게 연기하여
성인이 되었고, 우리는 성경 전체를 달달 외우면서도 관객석에 앉아 팝콘만 먹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경은 소설책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대본(Script)'입니다.
하느님 감독님은 이미 "레디, 액션!"을 외치셨습니다.
카메라 불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배우인 우리가 무대 위에서 대사만 분석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신년 하례식 미사에서 수원교구장 주교님은 올 해의 말씀으로 “원수를 사랑하여라.”를 뽑았다고
하셨습니다.
당신도 놀랐지만, 그 말씀을 한 해 동안 실천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매년 새로운 말씀을 내 안에서 육화시킨다면 시간인 지날수록 그리스도를 닮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올 한 해, 성경 전체를 다 알려고 욕심내지 맙시다. 안토니오 성인처럼, 딱 '한 구절'이라도 좋으니
정해봅시다.
"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마라"는 말씀이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내밀라"는 말씀이든, 하나를 정해서 그것을 내 삶으로 '성취'시켜 봅시다.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아낼 때, 메뉴판을 먹던 미식가에서 진짜 음식을 먹는 건강한 신앙인으로,
수영 교본을 덮고 물살을 가르는 구조자로 거듭날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우리를 보고 다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 저 사람들을 보니 정말 예수가 살아있구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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