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2,1-12
세상이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당신이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 병자를 고치시며 아주 중요한 선언을 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는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의 반응, 즉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움'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저는 가끔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합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도대체 쟤는 뭐지?"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의 계산법으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사람, 예측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묘한 두려움을 주는 사람. 그것이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
굶어 죽어가는 아사 감방에서 들려온 것은 저주가 아니라 기도 소리였습니다.
나치 간수는 훗날 증언했습니다.
"그 신부가 나를 쳐다볼 때, 나는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맑고 위엄 있는 눈빛이 무서웠다."
총을 든 군인이 굶어 죽어가는 신부의 눈빛을 무서워했습니다.
이것이 '품격'이 주는 공포입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두려움, 특히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담대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한 용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차원이 다른 생명'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루마불' 같은 보드게임을 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아이들은 장난감 지폐 몇 장을 잃으면 세상이 무너진 듯 울고불고 난리가 납니다.
그 게임 안에서는 그 종잇조각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곁에서 보는 아버지는 웃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는 진짜 돈이 들어있는 '실제 통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게임 머니는 그저 놀이 도구일 뿐입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우리에게 '진짜 통장'을 쥐여주시는 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목숨, 돈, 명예라는 '게임 머니'가 전부인 줄 알고 그것을 잃을까 봐 벌벌 떱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이 세상의 삶은 잠시 거쳐 가는 보드게임이구나.
나에게는 죽음도 앗아가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Zoe)이 이미 내 안에 있구나."
이 '진짜 생명'을 맛본 사람은 '가짜 생명(생존)'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시선과 위협으로부터 그토록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신(게임 머니)을 빼앗으려 했지만, 예수님은 당신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진짜 통장)이 건재함을 아셨기에 피식 웃으실 수 있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 안에서 죽음이 '마침표'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로 나가는 '문'으로 바뀝니다.
마치 딱딱한 껍질 속의 씨앗이 껍질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껍질이 깨져야(죽음) 비로소 싹이 트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으로
확 들어올 때, 우리는 세상을 경악하게 만드는 '경외감'의 주인공이 됩니다.
이 '생명의 배짱'을 보여주는 첫 번째 증거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이 법정은 명확합니다.
빌라도는 '죽일 권한(게임의 룰)'을 가진 판사고,
예수님은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피고인입니다. 세상의 공식대로라면 예수님은 울며 매달려야 합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법정의 공기는 기이하게 흐릅니다.
칼을 찬 빌라도는 안절부절못하며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합니다.
반면 묶여 있는 예수님은 태산처럼 고요합니다. 화가 난 빌라도가 소리칩니다.
"나에게 말을 안 할 셈이냐? 나에게는 너를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때 예수님은 서늘할 정도로 차분하게 대답하십니다.
"위에서 주지 않으셨다면 그대는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다."
이 순간, 빌라도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낍니다. 빌라도는 고작 예수님의 '육신의 껍질'을 깰 수 있을 뿐이지만, 예수님은 그 너머의 생명을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협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세상의 권력은 무력해집니다.
이 거룩한 생명력은 사도들에게도 이어집니다. 바오로와 실라스가 필리피 감옥에 갇혔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발에는 무거운 차꼬가 채워졌습니다.
상식적으로 그곳에서 들려야 할 소리는 신음이나 원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밤중에 그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비명이 아니라 찬미가가 울려 퍼집니다.
간수는 이 비상식적인 평화에 압도당합니다. 갑자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렸을 때, 간수는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 알고 자결하려 합니다. 그때 바오로가 외칩니다.
"우리는 여기 있다. 스스로 해치지 마라!"
간수는 등불을 들고 뛰어 들어가, 칼을 든 채 맨손의 죄수 앞에 무릎을 꿇고 덜덜 떱니다.
"선생님들,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이 주는 고통보다 내 안의 생명력이 더 클 때, 세상의 폭력은 우리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쿠오 바디스』에 나오는 원형 경기장 장면을 떠올려 봅니다.
사자들이 달려드는데도 서로 손을 잡고 평온하게 찬미가를 부르는 신자들을 보며, 피를 보고 싶어 했던 로마 관중들은 침묵에 빠졌고 나중에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세상은 나를 보고 '뭐지?'라고 반응하는가, 아니면 '너도 똑같구나'라고 반응하는가?"
하느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로 그런 사람,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그 '자유인'을 경외하게 됩니다.
부디 이번 한 주간, 세상의 예상과 반대로 가십시오.
성령께서 주신 진짜 생명을 믿고, 껍질을 깨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보며 거룩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십시오.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기적'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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