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남편과 통화하다가 끊기 전에 아주 자연스럽게 “사랑해요.”라고 말합니다. 이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남편에게 바로 전화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끊기 전에 친구처럼 “사랑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 낮술 했니?”
앞으로 이 자매는 남편에게 “사랑해요.”라는 말을 할까요? 그 뒤로 이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이 너무나도 미워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만약 평소에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해요.”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낮술 했냐는 실망스러운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주 하지 않던 말이었기에 남편은 어색한 마음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지요.
사랑이라는 말과 행동을 자주 표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어떤가요?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의 사랑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이 있는 곳에 당신의 은총과 사랑을 풍성히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딸을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당시 회당장은 유다인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층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의심받는 젊은 랍비였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것은 체면을 버린 아버지의 절박한 사랑과 절대적 신뢰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는 사랑을 본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가십니다. 그런데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예수님 소문을 듣고서 옷에 손을 댑니다. 율법에 따르면 피를 흘리는 여인은 부정하기에, 그녀의 행동은 율법적으로는 예수님을 부정하게 만드는 대담하고 위험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마르 5,30)라고 공개적으로 물으십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몰래 치유받고 사라지면 그녀는 육체적으로는 낫지만,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부정한 여인’으로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군중 앞에 세워 치유를 공증하고 사회적 지위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회당장의 집에서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줍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여인의 치유 사건으로 회당장 야이로에게 원망이 생기지 않았을까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죽었다는 회당장의 딸의 손을 잡으시며 “탈리타 쿰”(마르 5,41)라면서 살려내십니다. 사실 시체에 접촉하는 것도 부정한 것이 됩니다. 부정한 여인의 손대심을 허용했고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부정해지시지 않습니다. 당신의 거룩함과 생명이 부정함을 정화한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사랑,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사랑이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요? 과연 표현하는 사랑일까요? 생각만 하는 사랑일까요?
오늘의 명언: 가족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늘어나는 일도 있습니다만 슬픈 이별도 있습니다. 추억 또한 가족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마스다 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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