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르 6,1-6: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겪으신 놀라운 역설을 보게 된다. 군중은 처음에 그분의 지혜와 권능에 놀라워했으나, 곧 다섯 가지 의문을 던지며(2-3절)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국 예수님은 “고향에서는 예언자라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4절)고 말씀하시며,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에 놀라워하셨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목수”요 “마리아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단지 동네의 평범한 목수였을 뿐이다. 그들은 겉모습과 과거의 인연으로만 판단했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통해 드러내신 구원의 신비를 보지 못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이가 그리스도의 겸손 안에서 신성을 보지 못하여 넘어졌다.”(Sermo 183,1). 겸손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외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거부하게 된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주시는 것밖에는 아무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5절)고 기록한다. 기적은 하느님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의 응답이 필요하다. 교리서도 이를 이렇게 가르친다. “기적은 인간의 믿음과 하느님의 자유로운 주권적 행위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548항 참조). 즉, 불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우리 안에도 작은 나자렛이 있다. 우리는 이웃을 외모나 과거의 모습으로 쉽게 판단한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일으키시는 새로운 은총의 가능성을 믿지 못하고, 이미 정해진 틀 속에 가두려 한다. 이처럼 “나는 저 사람을 안다.”는 자기 확신이 오히려 믿음을 가리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권고한다. “하느님 말씀은 언제나 새롭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익숙하다고 여기면 더 이상 놀라워하지 않게 된다.”(Hom. in Ez. 1,7,8). 우리가 복음과 성사, 그리고 이웃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을 늘 새롭게 받아들이려면, 겸손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주님도 기적을 이루실 수 없지만, 작은 믿음이라도 주님께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신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보겠느냐, 아니면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믿겠느냐?” 우리 안의 불신과 편견을 내려놓고, 이웃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며, 믿음으로 주님께 마음을 열 때, 우리 삶 안에서도 놀라운 은총의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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