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6,1-6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멈추어야 할 가장 명확한 때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익숙하지만, 가슴 아픈 장면을 목격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셨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고, 형제들도 다 우리가 알지 않느냐?”
그들은 예수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안다’는 확신은 예수님을 ‘목수’라는 작은 상자 안에 가두는 감옥이 되었고, 결국 그분의 신성이 들어올 틈, 즉 기적을 막아버렸습니다.
여러분, 살면서 누군가가 여러분을 향해 “아유, 내가 너 속을 다 알지. 너는 딱 여기까지야”라고
단정 짓는다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소름 끼치지 않습니까?
오늘 저는 아주 명확한 인간관계의 법칙 하나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을 향해 “나는 너를 다 안다”라고 말하며 여러분을 자신의 낡은 지식 상자 안에 가두려 한다면, 그때가 바로 그 사람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다’는 말은 사실 “나는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너를 궁금해하지 않겠다”는 절교 선언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1. 엄마의 빗나간 사랑: 블랙 스완의 비극
이 무서운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블랙 스완’입니다.
주인공 니나는 완벽을 추구하는 발레리나입니다. 그녀의 엄마 에리카는 왕년에 발레리나였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여인입니다.
엄마는 딸 니나를 끔찍이 사랑합니다.
아니, 사랑한다고 착각합니다.
엄마는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합니다.
손톱 깎는 것부터, 식사량, 심지어 잠잘 때 자세까지 간섭합니다. 엄마는 늘 말합니다.
“니나, 엄마는 널 다 알아. 넌 내 딸이니까 내가 제일 잘 알지.”
하지만 엄마가 ‘안다’고 확신했던 니나는, 엄마가 만들어 놓은 ‘착한 딸’이라는 인형일 뿐이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규정했듯, 엄마는 니나를 ‘착한 딸’로만 규정하고
그 이상의 가능성(예술적 열정)을 전혀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니나는 엄마가 만들어 놓은 그 좁은 감옥을 깨부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광기의 춤을 추게 됩니다.
“너를 안다”는 엄마의 말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었고, 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저주였습니다.
2. 자베르 경감의 자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자베르 경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법과 원칙의 화신입니다.
그에게 세상은 딱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뉩니다. 법을 지키는 선인과, 법을 어긴 죄인. 그는 장발장을 쫓으며 확신합니다.
“범죄자는 영원히 범죄자다.
개꼬리가 3년 묵는다고 황모가 되더냐?”
그는 장발장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발장은 변했습니다.
은촛대를 받고 영혼이 뒤집힌 장발장은 성인에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자베르 경감이 혁명군에게 붙잡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살려준 건 다름 아닌 장발장이었습니다.
자베르는 혼란에 빠집니다.
“범죄자는 악당이어야 하는데, 나를 살려주다니? 내 데이터에 오류가 생겼다!”
그는 자신이 평생 믿어왔던 낡은 지식 체계가 무너지자,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센강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그는 판단을 멈추지 못해 스스로를 파괴했습니다.
3. “오늘의 김우진은 어떤 모습인가요?”
반대로, 상대를 다 안다고 말하지 않고 끊임없이 궁금해함으로써 사랑을 완성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를 보셨나요? 남자 주인공 우진은 자고 일어나면 매일 모습이 바뀝니다.
오늘은 노인, 내일은 아이, 모레는 외국인 여자... 겉모습만 봐서는 도저히 그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를 사랑한 여자 이수는 다릅니다. 그녀는 매일 바뀌는 낯선 얼굴들 속에서 우진 고유의 눈빛, 말투, 그리고 따뜻한 마음씨를 찾아내려 애씁니다. 그녀는 그를 만날 때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묻습니다.
“오늘의 김우진은 어떤 모습인가요?”
그녀에게 사랑은 ‘파악 완료’가 아니라 ‘매일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프랑스 인상파 화가 모네도 그랬습니다.
그는 ‘루앙 대성당’을 그릴 때, 똑같은 성당을 수십 번 그렸습니다.
아침의 성당, 점심의 성당, 비 오는 날의 성당...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아니, 다 아는 성당을 뭐 하러 또 그립니까?” 모네는 답했습니다.
“빛에 따라 성당은 매 순간 다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성당을 보고 싶습니다.”
대상을 고정된 물체가 아니라, 빛(은총)에 따라 매 순간 새롭게 변화하는 생명으로 바라보려는
그 호기심 어린 시선이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켰습니다.
4.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호기심의 상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하느님을 다 파악하고 나서 “아, 이제 알 거 다 알았으니 좀 쉬자” 하며
하품하는 곳일까요? 아닙니다.
4세기 신학자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신앙생활을 ‘에펙타시스(Epektasis)’, 즉 “끊임없이 뻗어 나가는 것” 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이기에, 우리는 영원히 그분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지루한 휴식이 아니라, 매 순간 하느님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와! 당신은 이런 분이셨군요!”라고 감탄하며 더 깊이, 더 높이 빨려 들어가는 역동적인 모험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얼마나 알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자렛 사람들처럼 “예수님? 아, 그분 하느님 아들이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뭐 착하게 살라고 하셨지. 나 다 알아!” 하며 퉁명스럽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다 안다”고 말하며 성경책을 덮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을 무한하신 하느님이 아니라
내 좁은 머릿속에 갇힌 피조물로 만들어버리는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결론: 영원한 연애를 시작하십시오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멈추어야 할 가장 명확한 때가 언제냐고요?
그 사람이 나를 향해 “난 널 다 알아. 넌 변하지 않아”라며 나의 가능성을 닫아버릴 때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쟤는 원래 저래”라며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때 사랑은 끝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점검해 보십시오.
혹시 권태기 부부처럼 “당신 얘기는 안 들어도 뻔해” 하며 10분도 안 되는 복음 말씀을 흘려듣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처럼, 처음에는 ‘유다 남자’로 알았다가, ‘선생님’으로, ‘예언자’로, 마침내 ‘그리스도’로 앎이 깊어지면서 자신의 물동이를 버리고 뛰쳐나가는 그 설렘을 회복하십시오.
하느님은 매일 새롭습니다.
그분에 대한 호기심이 살아날 때, 나자렛에서는 일어날 수 없었던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서는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아직 모릅니다.
오늘 저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이 호기심 가득한 질문 하나가, 오늘 여러분의 하루를 지루한 일상이 아니라 가슴 뛰는 천국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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