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은 스스로 라벨을 붙이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엄청난 정체성을 부여해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백화점 명품관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혹시 시장에서 파는 가방과 명품 가방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아십니까?
비가 올 때 반응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비가 쏟아질 때 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면 시장표고, 가방을 품에 꼭 껴안고 내 머리가 젖는 걸 선택하면 명품이라고 합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뼈가 있습니다. 명품은 스스로 “나 비싼 거야!”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 물건을 만든 장인이 붙인 ‘라벨’과, 그것을 소유한 주인의 ‘태도’가 그 가치를 증명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야”, “나는 좋은 엄마야”라며 스스로 라벨을 붙이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붙인 라벨은 가짜입니다.
진짜 라벨은 오직 나를 만드신 분만이 붙여주실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내가 나를 규정하려고 할 때, 인간은 길을 잃습니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페르 귄트』의 주인공 페르 귄트는 “너 자신이 되어라”는 유혹에 빠져
평생을 방랑합니다.
그는 부자가 되기도 하고, 예언자 행세를 하며 스스로를 ‘세계의 황제’라 칭합니다.
하지만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밭에서 양파 하나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며 이렇게 독백합니다.
“이 껍질은 부자였던 나, 이 껍질은 예언자였던 나... 그런데 알맹이는 어디 있지? 아무리 벗겨도
중심이 없구나.” 하느님이 주신 본래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수많은 가면을 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창조주가 부여한 질서를 거부하고 스스로 절대적인 정체성을 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의 그는 토리노의 광장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의 목을 껴안고 울다가 정신을 잃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보살핌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살았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철학자는 가장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창조주를 잃은 피조물의 고독한 최후였습니다.
인간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누가 나를 규정해 주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1920년 인도 늑대 굴에서 발견된 두 소녀, 카말라와 아마라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들은 분명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부모의 양육을 받지 못하고 늑대 틈에서 자랐습니다.
발견 당시 그들은 네 발로 기고, 날고기를 먹으며, 밤에는 늑대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너는 사람이다”라고 규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부모가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 인간다움을 세울 수 없습니다.
늑대와 대화하면 늑대가 되고, 하느님과 대화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반대로, 권위 있는 누군가가 긍정적인 라벨을 붙여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버드 심리학과 로젠탈 교수의 ‘피그말리온 효과’ 실험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무작위로 뽑은 학생들의 명단을 교사에게 주며 “이 아이들은 지능지수가 높은 영재들”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일종의 ‘규정’을 지어준 것이지요.
교사는 그 권위 있는 교수의 말을 믿고 아이들을 ‘영재’로 대우했습니다.
눈빛, 말투, 기대감이 달라졌습니다.
8개월 후, 놀랍게도 그 아이들의 성적은 실제로 급상승했습니다.
권위 있는 자의 긍정적인 규정이 평범한 아이를 비범하게 만든 것입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한 에디슨이 받아온 편지에는 “댁의 아들은 지적 장애가 있어 가르칠 수 없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린 에디슨에게 편지를 이렇게 읽어주었습니다.
“아드님은 천재입니다.
우리 학교는 수준이 너무 낮아 아드님을 가르칠 수 없으니 어머니가 직접 가르쳐주세요.”
어머니라는 절대적 권위자가 “너는 천재”라고 규정해 주었기에, 에디슨은 평생 자신을 천재로 믿고 살았고 실제로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규정해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칭찬이 아닙니다.
로젠탈 교수나 에디슨의 어머니처럼,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창조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이 진짜 믿어지십니까?
솔직히 거울을 보면 소금은커녕 곰팡이 같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이 선언이 믿어지려면 ‘보증’이 필요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는 전과자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장발장, 잊지 마시오. 나는 이 은으로 자네의 영혼을 샀소.
자네는 이제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이오.”
은촛대라는 값비싼 대가, 즉 희생을 치르고 붙여준 이 새로운 라벨이 장발장을 성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대가가 있어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화가 벤자민 웨스트의 일화도 있습니다. 그가 어릴 때 어머니의 화장품으로 엉망진창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보통 부모라면 혼냈겠지만, 어머니는 “어머, 이건 여동생 샐리구나!” 하며 아들에게 진한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훗날 거장이 된 벤자민 웨스트는 말했습니다.
“나를 화가로 만든 것은 그때 어머니의 키스였다.”
어머니의 키스가 그를 화가로 만들었듯,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곧 그분의 ‘피(Blood)’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키스이자, 우리 영혼에 찍힌 도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값을 치르고 “너는 내 것이다, 너는 빛이다”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라는 닭장에 살고 있는 독수리들입니다.
어느 농부가 독수리 알을 주워 닭장에서 부화시켰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어미 닭을 따라 모이를 쪼며
“나는 닭이다”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동물학자가 와서 그를 절벽으로 데려가 던지며 외쳤습니다.
“너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다! 하늘이 너의 집이다, 날아라!”
처음에는 믿지 못해 퍼덕거렸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본능과 학자의 외침을 믿고 날개를 펴자
창공으로 솟구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너는 흙수저가 아니다.
너는 실패자가 아니다.
너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알려주시는 동물학자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로 그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분이 붙여주신 라벨을 믿고, 닭장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소금임을 믿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빛임을 믿고 올바른 삶의 길을 알려주는 행동할 때, 그것을 믿고 매일 할 때, 우리는 진짜 빛과 소금이 됩니다.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성 대 레오 교황님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존엄성을 깨달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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