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 5,20-26: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우 급진적이고도 근본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0절). 주님께서는 단순히 율법의 외적인 준수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비롯된 사랑과 화해의 삶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21절)는 계명을 넘어, 형제를 향한 분노, 업신여김, 모욕조차도 살인의 씨앗이라고 말씀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주님께서는 분노 자체를 뿌리째 뽑아버리신다. 살인은 분노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In Matthaeum Hom. 16,6)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의로움이 단순히 행위의 외적 준수에 머무르지 않고, 내적 의도와 마음의 상태까지 포함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가서 화해하여라.”(23-24절)고 하신다. 이는 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과 화해의 삶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만일 네가 형제와 화해하지 않았다면, 네가 제단에 바치는 제물은 아무 소용이 없다. 화해는 제물보다 앞서야 한다. 왜냐하면 화해 자체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제물이기 때문이다.”(Sermo 229D,1) 교회도 전례 안에서 같은 정신을 이어왔다. 영성체 전 ‘평화의 인사’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우리가 화해의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복음적 요청을 반영하는 전례적 행위이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하신다. 교부들은 고발자를 양심, 혹은 성령으로 해석했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고발자는 바로 우리 안의 양심이다. 양심의 음성을 억누르지 말고, 지금 당장 그와 화해하라. 그렇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고발할 것이다.”(In Matthaeum 14,2) 성령께서도 우리 안에서 죄를 고발하신다. 우리가 회개와 화해를 거부하면, 성령은 결국 최후의 날 우리를 심판대에 서게 할 것이다.
교회는 이 복음 말씀을 화해 성사와 연결하여 전통적으로 해석해 왔다. 교리서는 “화해의 성사”가 하느님과 교회 공동체와의 일치를 회복하는 것임을 가르친다(1424). 또한 성체성사에 참여하기 전에 죄를 고백하고 화해할 것을 강조한다(1385). 따라서 오늘 복음은 단순히 인간관계에서 화해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화해를 말한다.
용서와 화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십자가 위에서 원수들을 용서하신 주님의 은총 안에서 우리는 화해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제물보다 앞서야 할 것은 사랑이며, 제사보다 앞서야 할 것은 화해다. 우리가 이웃과 화해할 때 비로소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이룰 수 있다. 그리하여 가장 아름다운 제물을 봉헌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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