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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30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3-30 조회수 : 163

 [성주간 월요일] 
 
요한 12,1-11 
 
누구든 바치는 대로만 받는 이유 
 
 
오늘 우리는 성주간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을 예표하는 아주
아름답고도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바로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붓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린 사건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인간상을 만납니다.
아낌없이 바치는 마리아와, 그 바침을 '낭비'라고
비난하며 계산기를 두드리는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바침'의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꾸 바치라고 하시는가?
그분께서 돈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정성을 시험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바침은 오직 '우리의 성장'을 위한 하느님의 교육 시스템입니다.
누구든 바치는 대로 받게 되어 있고, 그 바침의 크기가 곧 그 사람의 영적 성장의 척도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부모가 자녀에게 모든 것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성장의 원리는 아이가 부모에게 '바치기 때문에' 자라난다는 사실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십시오.
아기가 부모에게 무엇을 줄 수 있겠습니까? 경제적인 도움을 줍니까?
집안일을 돕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아기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것은 바로 '온전한 신뢰'와 '웃음', 그리고 부모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다는 '전적인 의탁'입니다.
아기는 부모를 향해 방긋 웃어주고, 부모의 손가락을 꽉 쥐며 자신의 존재 전체를 바칩니다. 
 
부모는 그 아기의 '바침'을 받고 자신의 생명과 시간, 돈과 열정을 쏟아붓습니다.
아이는 부모에게 기쁨을 바치고, 부모는 아이에게 생존을 줍니다.
이 교환이 일어날 때 아이는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내가 나의 소중한 것을 '바쳐도' 부모라는 거대한 배경이 나를 채워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아이는 비로소 '나'라는 좁은 이기주의의 감옥을 뚫고 타인과 소통하는 성숙한 존재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반면, 부모를 믿지 못하는 아이는 결코 바치지 않습니다.
빼앗길까 봐 움켜쥐기만 합니다.
그런 아이는 몸은 자랄지 몰라도 영혼은 이기주의에 갇힌 기형적인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더 귀한 것을 바칠수록 더 큰 사랑과 보상이 돌아온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배우며 아이는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성장이 멈추는 시기가 옵니다. 바로 사춘기입니다.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은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만큼 공부하고 노력해서 부모님께 성적표를 바쳤는데, 왜 내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이 오지 않지?'
혹은 '내가 내 자유를 바쳐서 부모님 말씀에
순종했는데, 왜 돌아오는 건 간섭뿐이지?' 
 
이때부터 아이는 부모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장을 멈추고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갑니다.
성장이란 나라는 좁은 자아를 벗어나 타인에게 나를 내어주는 과정인데, 보상이 확실하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은 다시 이기적인 자아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인 『윌리엄 다몬(William Damon)』은 그의 저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자신을 넘어서는 가치에 헌신(바침)하지 않는
아이들은 삶의 목적을 잃고 우울증과 무기력에 빠진다.
반면,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타인이나 공동체에
기꺼이 바치는 아이들은 자존감이 높고 정서적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다." 
 
결국, 우리가 하느님 부모님 밑에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바치기를 멈췄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치는 것만큼 하느님이 주시지 않는다는 불신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마리아가 아니라 유다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녀가 바친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 가치가 있었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일 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금이었습니다.
결혼을 앞둔 여인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담보하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왜 이것을 바쳤을까요? 
 
그녀는 알았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목숨값'과 같은 이 향유를 바칠 때, 그녀는 비로소 '나'라는 좁은 미래와 집착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향유는 마리아의 목숨을 상징합니다.
그녀가 향유 옥합을 깨뜨린 것은 자신의 자아를 깨뜨린 것입니다. 
 
"성령"은 바로 그 깨어진 자아의 틈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바쳤을 때,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영원한 생명'과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기억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반면 유다 이스카리옷을 보십시오.
그는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는가?" (요한 12,5) 겉으로는 정의로워 보이지만, 성경은 그가 '도둑'이었다고 꼬집습니다.
유다는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도, 예수님을 위해서도 자신의 것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동체의 돈을 훔치며 자신의 자아를 더 뚱뚱하게 불리고 있었습니다. 
 
유다가 바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만큼 바쳐도 그분이 그만큼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신, 아니 그분보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이 더 확실한 생명이라는 믿음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바치지 않는 인간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유다는 예수님 곁에 3년이나 있었지만, 단 1밀리미터도 영적으로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혼은 여전히 돈 주머니라는 좁은 감옥에 갇혀 있었고, 결국 그 자아를 이기지 못해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희생과 봉사, 그리고 헌신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부려 먹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바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나'라는 좁은 감옥에 갇힌 어린아이로 남기 때문입니다.
바침은 우리를 이기주의에서 탈출시키는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하.사.시.를 읽는 동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기 위해 오셨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난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가 되었고, 그렇게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다 내어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난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분을 다시 만났고, 이젠 다 주신 분 앞에서 아직도 쩔쩔매며 아끼고 있는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장입니다.
처음부터 다 주셨다고 했다면 나도 다 내어주어야 했기에 신학교에 들어갈 엄두를 못 냈을 것입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바치라고 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가진 것이 탐나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하늘의 보화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손에 쥐고 있는 작은 도토리를 놓아야 하느님은 그 손에 거대한 숲을 쥐여주실 수 있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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