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수요일]
마태오 26,14-25
하느님은 다 알고 계시는데, 왜 굳이 죄를 고백해야 할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며 폭탄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마태 26,21)
이 말씀에 제자들은 큰 슬픔에 잠겨 저마다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2)
그런데 가리옷 유다도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5)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질문 같지만, 유다의 질문에는 하느님을 향한 무서운 '시험'과 '거짓'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유다의 호칭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Kyrie)"이라고 불렀지만,
유다만은 "스승님(Rabbi)"이라고 부릅니다. 유다에게 예수님은 내 생명의 주관자가 아니라,
단지 내가 속일 수 있고 내 계획을 평가받아야 할 한 명의 현자에 불과했습니다.
유다가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이런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똑똑해도 내가 은밀히 사제들에게 받은 은 서른 냥은 모를 거야.
아니, 혹시 알아차렸더라도 이 거룩한 만찬 석상에서, 동료들 앞에서 내 정체를 폭로하여
분위기를 망칠 정도로 무자비할 수는 없지. 이것이 이분의 약점이야.'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믿음, 혹은 "알아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며 하느님의 자비를 역이용하는 비겁함입니다.
나를 진실하게 할 대상, 곧 주님이 사라진 자리는
즉시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탈개인화(Deindividuation)'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이 가려지고 타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 평소에 작동하던 도덕적 규범과 사회적 책임을 한순간에 던져버립니다.
현대 사회의 악플 문화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에드워드 디너(Edward Diener)의 실험은 이를 소름 돋게 증명합니다. 핼러윈 밤, 아이들에게 사탕을 마음껏 가져가라고 했을 때, 혼자 온 아이들보다 가면을 쓰고 단체로 움직여 자신의 신분이 모호해진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고 사탕을 훔쳐 갈 확률이 무려 57%나 높았습니다.
유다가 바로 이 영적 탈개인화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그는 '나는 누구도 모르게 완벽히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 익명성에 대한 믿음은 자유가 아니라, 인간을 통제 불능의 짐승으로 만드는 독약입니다. 자신을 지켜보는 절대자의 시선을 지워버린 유다에게 남은 것은, 결국 스스로 목을 매는 비참한 종말뿐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이 환상에 빠졌습니다.
죄를 지은 그들은 숲속에 숨어 무화과 잎사귀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실 때,
그들은 사실 하느님이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주님, 저희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고 "저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라고
핑계를 댄 이유는, 하느님을 '다 아시는 분'으로 대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나를 가리게 만들고, 가리는 행위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부인하는 불신앙으로 이어집니다.
유다의 "저는 아니겠지요?"는 에덴동산의 그 비겁한 숨바꼭질이 변주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죄를 향한 욕구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지켜봐 줘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 왕의 사례에서 고백의 위대함을 봅니다.
다윗은 밧 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은폐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가 나타나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지적했을 때, 다윗은 유다처럼 발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2사무 12,13)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깨달았습니다.
'아, 하느님은 다 보고 계셨구나.
내가 숨길 곳은 우주 어디에도 없구나.' 이 자각이 그를 살렸습니다.
시편 139편에서 그는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낱낱이 아십니다.
제가 앉으나 서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
다윗이 성군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고백은 하느님께 정보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 안으로 나를 동기화(Sync)시키는 과정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사무엘기 하권 12장)
여기서 우리는 신자분들이 가장 자주 던지는 질문에 답해야 합니다.
"신부님,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는데 굳이 구구절절 제 입으로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하느님은 정보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은 하느님을 인정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고백은 바로 이 실험의 영적인 완성입니다.
내가 고해소에서 내 입으로 죄를 뱉는 순간,
내 뇌와 영혼은 "하느님께서 지금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재로 받아들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하느님은 나를 정직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백을 통해 그분의 시선을 내 삶의 중앙에 모실 때, 우리는 비로소 '거짓의 옷'을 입고 살 수 없게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이미 꿰뚫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어느 주일, 성당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몰래 오락실에 다녀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완전범죄를 꿈꾸며 성당 입구에서 주보만 슬쩍 챙겨 집으로 돌아왔지요.
어머니 앞에 주보를 당당히 내밀며 "엄마, 저 성당 잘 다녀왔어요!"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눈빛이 이상했습니다.
어머니는 "정말 성당만 갔다 왔니? 신부님 강론은 어떠셨어?" 라고 넌지시 물으셨습니다.
저는 대충 둘러댔지만, 결국 어머니는 제가 오락실에서 게임에 열중하고 있던 모습을 동네 아주머니를 통해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다 알고 계시면서 왜 나한테 물어보셨을까?'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것은 저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하려는 어머니만의 '거짓말 방지 장치'였습니다.
엄마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제가 직접 고백하게 함으로써, 제가 '거짓으로 숨길 수 있다'는 오만한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가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다면, 저는 끊임없이 제 자아를 긍정하며 '거짓말은 유용한 수단'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거짓을 아버지로 삼고 사는 사람은 결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엄마의 질문은 제가 진실 앞에 무릎 꿇게 하려는 사랑의 초대였습니다.
이번 성주간 수요일, 우리도 유다의 질문 "저는 아니겠지요?"를 멈춥시다.
대신 다윗처럼,
그리고 돌아온 탕자처럼 고백합시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고해소에 들어갈 때, 그곳은 심판의 자리가 아니라 거짓의 옷을 벗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빛의 옷으로 갈아입는 잔칫집이 될 것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주님, 제가 고백하지 않아도 당신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가 고백하는 이유는 제 마음의 닫힌 문을 열어 당신의 빛이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백은 하느님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출처: 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제10권).
또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죄를 숨기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의 비밀은 지옥의 불씨가 되고, 하느님 앞에서의 폭로는 천국의 이슬이 된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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