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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3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4-03 조회수 : 63

[주님 수난 성금요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십자가는 또 다른 세족례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 (요한 19,30)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신 그 현장에 서 있습니다.
성 금요일의 십자가는 단순히 한 의로운 인간의 비극적인 처형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만이 하실 수 있는 거대한 '낳음'의 현장이자, 인류의 찌든 자아를 씻어내는
'두 번째 세족례'의 현장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다인들도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아들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아들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은 '죄를 없애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죄란 무엇일까요?  
 
창세기에서 뱀은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오직 자기 자신,
즉 '자아'만을 위하며 땅의 것(욕망과 두려움)에만 집착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는 그런 마음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직 사랑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 목요일에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오늘 십자가 위에서 옆구리를 열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땅에 붙어 자아라는 감옥에 갇힌 우리의 '발'을 씻겨 하늘로 들어 올리시는 '피의 세족례'를 거행하신 것입니다. 
 
1942년 8월 5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야누슈 코르차크(Janusz Korczak) 박사와 192명 아이들의 마지막 행진은 이 피의 권능을 명백히 증명합니다.
나치가 고아원 아이들을 트레블린카 가스실로 끌고 가려 할 때, 아이들은 처음엔 극심한 공포라는 '죄'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이들은 구석에 몰려 바들바들 떨며 비명을 질렀고, 박사의 옷자락을 붙들고 "살려주세요, 무서워요!"라며 울부짖었습니다.
오직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뱀의 발)에 묶여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지요. 
 
그때 코르차크 박사는 도망칠 수 있는 사면권을 찢어버리고 아이들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아이들의 공포를 씻어주기 위해 기적 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얘들아, 이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배낭을 메거라. 우리는 지금 소풍을 가는 거란다." 
 
박사는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속삭였습니다.
"선생님이 너희 곁에 끝까지 함께 있을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아름다운 나라로 가는 거니 무서워할 것 하나도 없다." 
 
이 '피 끓는 사랑의 선언'이 떨어지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까지 땅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울던 아이들이, 마치 새로 태어난 이들처럼 당당하게 일어섰습니다.
목격자 예호슈아 페를레(Joshua Perle)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고아들의 행렬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박사님이 만들어준 초록색 '국왕 매트 1세'의 깃발을 앞세우고, 깨끗한 옷을 입은 채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 대신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존엄함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박사가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동행한다는 것을 믿었을 때, 비로소 자기 생명에
집착하던 '뱀의 발'을 떼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날개’를 회복하여 그 위엄을 회복했습니다.
이 희생적인 죽음만이 타인을 두려움이라는 죄의 무덤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출처: 베티 진 리프턴, "아이가 있는 곳이 천국이다: 야누슈 코르차크의 생애") 
 
1597년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부하들은 '두려움'이라는 죄에 압도되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뒤로 물리고 머뭇거렸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역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엄명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장군은 비겁하게 뒤에서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대장선 한 척을 몰고 적진의 한가운데로 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들을 깨우려면, 내가 죽어야겠지!" 
 
부하들은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장군이 홀로 적들을 무너뜨리며 피 흘리는 그 '죽음의 헌신'을 목격하자, 그들의 가슴 속에서 '두려움'이라는 낡은 자아가 죽고 '용기'라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저분처럼 할 수 있는 존재다.”  
 
이 믿음이 두려움의 죄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장군의 죽음을 각오한 선구자적 행동은 부하들의 발을 땅(두려움)에서 떼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몰아 적진으로 돌진했고, 결국 불가능해 보이던 승리를 일구어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쏟은 땀과 피가 부하들의 비겁한 발을 씻어준 세족례가 되었고, 그들을 진정한 전사로 다시 낳은 것입니다.
(출처: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자) 
 
결국 하느님 자녀로서 죽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킬 수 없습니다.
피 없이 탄생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오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이 신비를 완성하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입니다.
이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직접 십자가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현대의 성녀 에디트 슈타인(St. Edith Stein), 즉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성녀의 사례를 보십시오.
그녀는 1939년 6월 9일 자신의 영적 유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해 마련하신 죽음을 저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주님, 저의 삶과 죽음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특별히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받아 주소서." 
 
그녀가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수송 열차에 실려 웨스테르보르크(Westerbork) 임시 수용소에
머물 때였습니다.
수용소는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수천 명의 유다인을 짓눌렀고, 특히 어린아이를 둔 어머니들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들은 며칠 동안 넋이 나간 채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고, 아이들은 굶주림과 오물 속에서
울부짖었습니다.
공포라는 '뱀의 저주'가 어머니들의 모성마저 마비시켜버린 것입니다. 
 
이때 에디트 슈타인이 나섰습니다.
그녀는 마치 성 목요일의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어머니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주고, 옷에 묻은 오물을 닦아주며,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천상의 평화가 감돌았습니다. 
 
성녀의 이 '피 끓는 세족례'를 목격한 어머니들은 전율했습니다.
성녀가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의연한 희생은 마비되었던 어머니들을 깨웠습니다.
어머니들은 다시 일어나 아이들을 안아주었고,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을 회복한 채 가스실로 향했습니다.
성녀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공포의 노예였던 이들을 당당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낳은 것입니다.
(출처: 성녀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의 『영적 유서』, 1939; 월터 허브너,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순교』) 
 
예수님은 우리에게 멋진 교훈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옆구리를 열어 우리를 낳아주러 오신 참된 어머니이십니다.
자녀를 낳는 어머니의 피 흘림이 있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듯, 예수님의 피 흘림이 있었기에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죄의 태반을 끊고 아직 묶여 있는 이웃을 바라볼 수 있고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 성 금요일, 주님의 수난을 슬퍼만 하지 마십시오.
그분이 흘리신 피의 무게만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죽어줄 용기를 가집시다.
죽어야 삽니다.
살려고 하면 죽습니다.
낳아서 자녀를 주님께 봉헌해야 그분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비참한 패배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이 증오를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린 가장 찬란한 승리의 보좌이자, 영원한 생명이 태어나는 거룩한 자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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