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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4-12 조회수 : 99

[부활 제2주일] 
 
 요한 20,19-31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실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29)
부활하신 주님의 자비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의심 많은 토마스 사도에게 나타나셔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보면 더 잘 믿을 텐데, 그러면 더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정반대를 말씀하십니다.
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행복할까요?  
 
우선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겠습니다. 행복은 곧 '만족'입니다.
그런데 이 만족은 내가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작아지느냐에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 때문에 낙원의 모든 것에 불만족을 느꼈고 결국 불행해졌습니다. 
 
「로또 당첨자들의 비극과 쾌락 적응의 법칙」
실제로 수백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의 80% 이상이 이전보다 더 불행해진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뇌는 강렬한 도파민의 자극을 금방 기본값으로 설정해버립니다.
공돈이 생기니 "나는 이제 남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는 교만이 커지고, 교만해지면 관계는 깨지며, 만족의 기준치는 끝없이 높아져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진정한 행복은 많이 가지는 방향이 아닌 내가 작아져 지금 가진 것에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언제 작아질까요? 사랑받을 때 작아집니다.  
 
19세기 프랑스의 한 교만한 귀족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품위와 지위를 지키는 것을 인생의 최대 가치로 여겼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숲에서 길을 잃고 사흘 동안 굶주림에 지쳐 쓰러졌습니다.
그때 한 더러운 산골 노인을 만납니다.
그 노인은 자신의 곰팡이 핀 빵 조각을 그녀에게 내주었습니다. 
 
부인은 평소라면 침을 뱉었을 그 빵을 받아 먹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녀는 훗날 고백했습니다.
"내가 평생 화려한 연회에서 먹었던 진수성찬보다 그 노인의 빵 한 조각이 나를 더 행복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나는 내가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 누군가의 자비 없이는 단 10분도 살 수 없는 비참한 존재임을 처절하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완전히 깨졌을 때, 인간은 비로소 단 하나의 숨결에서도 하느님의 우주적인 사랑을
발견하고 만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랑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할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한순간에 죽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해준 분을 믿고 끊임없이 나아가지 않으면 사랑을 받아도 다시 교만해집니다.  
 
아프리카의 일부 부족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성인식 전통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깊은 숲으로 들어가 아들을 커다란 나무에 묶어놓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내일 아침까지 여기서 혼자 견뎌야 진짜 어른이 된다"라는 말만 남기고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소년은 처음에는 맹수들의 울음소리와 공포에 떨며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아버지는 나를 버렸어! 나를 사랑하지 않아!" 자기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발견합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믿는 길뿐입니다.
‘그동안 아버지가 나에게 주신 사랑이 있는데, 그래 믿자. 아버지가 나를 버리실 분이 아니야!’
이런 자신을 아버지께 대한 신뢰로 맡기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아버지와 온 마을 사람들이 활을 들고 밤새 그를 지켜주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른은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존심 센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더 큰 존재에게 온전히 의탁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의 침묵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방관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날개를 펴게 하려는 거룩한 전략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무섭다고 울어대는 아들에게
5분마다 나타나 "나 여기 있다, 걱정 마라"라고 했다면 소년은 결코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를 믿음을 통해 버리는 과정은 오랜 혼자만의 작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동료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요한 20,25)라고 증언할 때 일주일 동안이나
고독한 의심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실 그 시간은 토마스가 제련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주님은 토마스가 자신의 '눈'이라는 오만한 도구를 내려놓고 동료들의 '말씀'을 믿는 겸손한 존재가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바람에 일주일밖에 자신을 죽이는 노력을 할 수 없었지만, 그 짧은 시간의 결핍이 토마스의 남은 인생 전체를 주님께 봉헌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비가 너무 안쓰러웠던 그는 가위로 고치를 살짝 찢어주었습니다.
나비는 아주 쉽게 밖으로 나왔지요.
하지만 그 나비는 날개를 펴지 못한 채 바닥을 기어 다니다 얼마 못 가 죽고 말았습니다.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사실은 날개에 있는 액체를 온몸으로 보내 날개를 단단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고통 중에 즉시 개입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우리가 믿음이라는 날개를
스스로 펼쳐 천국으로 날아오를 힘을 기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겸손해져서 "주님 없이는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할 때까지 주님은
방해하지 않고 숨죽여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사랑을 믿고 더 의탁하는 존재가 되도록 믿음을 키워갑시다.
그러면 자아가 작아져 큰 평화와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 느끼게 될 것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요, 그 믿음의 보상은 믿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모습을 감추시는 이유는 우리 마음의 눈을 정화하여, 훗날 당신을 대면했을 때 그 기쁨이 영원히 마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복음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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