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간 수요일]
요한 6,35-40
살고 싶거든 살리십시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은 나다." (요한 6,40.48 참조)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단 하나의 목적을 선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살리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러 오신 분이기에, 생명을 살리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생명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 명백한 생명의 빛 앞에서도 눈을 감고 "저건 속임수다!"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은 '인식의 자격'과 '생명의 감각'에 대해 1시간 동안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
1879년, 프랑스 느베르 수녀원에서 35세의 나이로 선종한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의 시신은
1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부패하지 않은 채 생생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1909년, 1919년, 1925년 세 차례에 걸친 공식 검시에서 의사들은 경악했습니다.
내부 장기는 여전히 탄력이 있었고, 혈관 속에는 액체 상태의 혈액이 남아 있었으며, 피부는 마치 잠든 사람처럼 부드러웠습니다.
이것은 과학을 초월한 하느님의 '생명 수호'의 표징입니다.
하지만 이 기적 앞에서 세상은 둘로 나뉩니다. 믿는 자들은 하느님의 전능함에 전율하며 자신들도 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를 희망합니다.
반면, 믿지 않는 자들은 "방부 처리를 한 것이다",
"밀랍 인형으로 바꿔치기했다"라며 온갖 음모론을 쏟아냅니다.
왜 똑같은 실체를 보고도 반응이 다를까요? 결론은 간단합니다.
생명을 주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피 한 방울, 시간 한 조각을 내어줘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위로부터 내려온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지 못하니 하느님도 하실 리 없다고 믿는 지적인 자폐 상태, 이것이 바로 영적 불신의 본질입니다.
생명의 감각이 죽은 자에게 기적은 그저 정교한 마술에 불과합니다. (출처: 르네 로랑탱,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인간은 자신이 가진 것을 타인에게 투사(Projection)합니다.
내 안에 생명을 살리려는 선의가 없으면, 타인의 숭고한 행동조차 '비열한 연극'이나 '정치적 계산'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체를 보면서도 주님의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사기'를 봅니다.
소설 속 자베르 형사는 법과 응징만이 정의라고 믿는 인물입니다.
그는 미리엘 주교가 은식기를 훔친 장 발장에게 은쟁반까지 내어주며 용서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것을 '숭고한 사랑'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베르의 머릿속에서 주교의 행위는 '범죄자를 교묘하게 심리적으로 굴복시키려는 위선적인 기술'이거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노망난 노인의 실수'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평생 누군가를 살려본 적이 없고 오직 잡아 가두는 일만 했기에, 생명을 살리는 '자비'라는
단어를 자신의 사전에서 지워버렸습니다.
나중에 장 발장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줬을 때도,
자베르는 그 선행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악당이 나를 살릴 리가 없다! 이건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라고 비명을 지르며 센강에 몸을 던집니다.
자신의 내면이 어두우면 빛조차 자신을 태우는 불길로 느끼게 됩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의지가 없는 자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감옥이 됩니다.
(출처: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반면, 작은 생명이라도 살리려 애쓰는 사람은 그 실천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으로 한 걸음씩
다가갑니다.
등불을 사랑하다 보면 태양을 갈망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위대한 인도주의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회고록을 보면, 그의 신앙은 '살리려는 의지'와 함께 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새총으로 새를 잡으러 가자고 했을 때 그는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나무 위에 앉아 노래하는 새를 조준하는 순간, 마을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소리는 그에게 "살려라!" 하는 하느님의 음성처럼 들렸습니다.
그는 새총을 던져버리고 박수를 쳐서 새들을 날려 보냈습니다.
이 작은 '살림의 경험'은 그의 영혼에 거대한 지진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이후 곤충 한 마리도 함부로 죽이지 않으려 애썼고, 30세가 되던 해에 "이제부터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살리는 데 내 생명을 다 쓰겠다"라고 결단하며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로 떠났습니다.
슈바이처는 환자들의 썩어가는 살점을 닦고 그들을 살려내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생명을 살리려는 나의 이 갈망은, 바로 나를 살리려 하시는 하느님의 갈망이 내 안에서 메아리치는 것이었구나!"
그는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는 예수님을 보며, 그것이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온 인류를 살리려는
'우주적인 생명 경외'의 정점임을 단번에 이해했습니다.
생명을 아끼는 연습이 그를 신학의 문자로 된
예수님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시는 생명의 주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출처: 알베르트 슈바이처, 『나의 생애와 사상』)
살리려는 의지는 무신론자의 굳게 닫힌 마음도 단숨에 부활시킵니다.
밀라노에 사는 청년 안드레아는 철저한 유물론자였습니다.
그는 신을 믿는 이들을 나약한 패배자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폭우가 쏟아지던 밤, 그는 길가 배수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그날따라 고양이의 절박한 눈망울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그는 차가운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진흙투성이가 된 고양이를 건져 올렸습니다.
자신의 비싼 외투 안으로 고양이를 품고 집으로 달려와 밤새 체온을 나눠주었습니다.
새벽녘, 고양이가 기적처럼 눈을 뜨고 가냘프게 야옹 소리를 내며 안드레아의 손바닥을 핥았을 때, 그는 전율했습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작은 심장의 박동, 그 생명의 신비 앞에 안드레아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이 보잘것없는 생명을 살리려고 이렇게 행복해하다니!
그렇다면 이 생명을 만드시고, 지금 나를 살려두고 계신 분은 얼마나 더 큰 기쁨으로 나를 보고 계실까?'
이 질문은 그를 성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제대 앞에 서서 신부님이 들어 올리는 성체를 보았습니다.
이전에는 그저 밀떡 조각으로 보이던 그것이, 이제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하느님이 품고 계신 뜨거운 심장'으로 보였습니다.
안드레아는 고백했습니다.
"내가 고양이를 살렸을 때 느꼈던 그 절박한 사랑이, 바로 저 빵 안에 들어있음을 저는 온몸으로 느낍니다."
생명을 살려본 사람만이 생명의 주인을 알아봅니다.
(출처: 이탈리아 가톨릭 잡지 『Famiglia Cristiana』 회심 사례 재구성)
남을 비난하고 죽이는 일에 익숙한 손은 결코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을 만질 수 없습니다.
작은 생명이라도 살리려 애쓰십시오.
상처받은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절망에 빠진 이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십시오.
여러분이 누군가를 살릴 때, 여러분의 영안(靈眼)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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