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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22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4-22 조회수 : 101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강론> 
 
(요한 6,35-40)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5ㄴ-40).” 
 
1)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에게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들을 나는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여러 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원하고,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주님의 구원 사업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일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2) ‘아버지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곧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38절의 “내 뜻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뜻’과 다른 ‘예수님의 뜻’이 따로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라” 라는 의미입니다. 
 
3) “하나도 잃지 않고” 라는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 또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은, 최고 수준의 성덕을 쌓은 사람들이나 성인 성녀들에게만 허락되는 일이 아니라, ‘충실하게 믿는 이들 모두’에게 허락되는 일입니다. 
 
성경과 교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도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사랑 실천이 부족해도, 또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아도, 주님께서는 어떻게든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이 말을 신앙생활에 관한 말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나이가 어린 사람도,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도, 몸이 불편한 사람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바로 그 ‘잘나고 똑똑함’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못나고 모자란 사람들이 더 쉽게,
더 많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0.27-29).”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라고 경고하셨습니다. 
 
4) “하나도 잃지 않고”를, “하느님께서는 ‘너를’ 잃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나의 ‘일대일’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생활입니다.
착한 목자가 애타게 찾는 ‘잃은 양’이 바로 ‘나’입니다.
37절의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과 39절의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을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음을 뜻하는 말씀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응답’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고, 신앙생활도 바로 ‘나 자신이’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임승차 할 수는 없습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1).” 
 
따라서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긴 해도, 그것은 ‘무조건’ 그렇게 된다는 약속이 아니라, “스스로 희망하고, 응답하고, 노력하는 사람에 한해서 모두” 라는 조건부 약속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 예수님께서는 그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셨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구원하는 것은,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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