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13,16-20
신적 존엄성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비참함을 선택하신 주님!
유학 시절 첫해 성 주간을 이탈리아 한 교구에 가서 주임 신부님 사목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기도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부활절을 앞두고 꽤 많은 사람이 고백성사를 보더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에 남은 사목은 주임 신부님과 구역을 나눠 본당 내 모든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서 가정 축복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초대형견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대환영을 받습니다.
거기 할머니들도 우리 한국의 할머니들 못지않게 인정이 많아, 축복 예식을 마치고 나올 때,
꼬깃꼬깃 접혀있는 쌈짓돈을 찔러주시곤 했는데, 주임 신부님 엄명에 따라 모두 모아 본당 사무실에 드리곤 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제가 사목 보조하던 본당에 유명하신 추기경님이 방문하셔서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미리 발씻김 예식에 참여할 신자들 열두명을 선발해서 의자까지 다 셋팅해놓았는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한 분이 안나타났습니다.
주임 신부님의 눈짓으로 엉겁결에 제가 부랴부랴 비어있는 한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정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난꾸러기였는데, 동짓날 어머니께서 큰 가마솥에 팥죽을 쑤고 계셨는데,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왼쪽 발이 펄펄 끓는 솥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큰 화상을 입었고, 아직도 그 상흔이 크게 남아있습니다.
제가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는데, 상처도 크고 너무 부끄러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훌륭하신 추기경님께서 제 발을 그냥 적당히 씻는 것이 아니라 아주 뽀득뽀득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추기경님께서 제 발에다가 입까지 맞추셨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부끄럽고,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옛날 2천 년 전 예루살렘 다락방에 앉아있었던 베드로 사도의 심정도 이러했겠지, 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습니다.
세족례와 관련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족례를 거행하시기 전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신적 영광을 드러내는 겉옷을 벗으시고 종의 신원을 드러내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신적 존엄성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세족례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왕 중의 왕,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종들인 제자들이 왕이신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왕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서 당신은 세상의 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왕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섬김의 왕이고 봉사의 왕이고 겸손의 왕이심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 왕에 대한 전통적인 페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놓으셨습니다.
왕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뜻밖의 상황에 깜짝 놀란 수제자 베드로는 완강히 거부합니다.
“제 발은 절대 씻지 못하십니다.”
베드로의 이 반응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생관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우리도 오늘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분의
겸손한 제스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태도를 우리 것으로 만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권위나 힘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어깨에 힘 줘서는 안됩니다.
쥐 꼬리 만한 권위라 할지라도 뭔가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을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족례의 정신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