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안에 머물기
오늘 복음 말씀은, 제자들에게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밝히신 다음,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하신 어제의 말씀에 이어,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이미 그분을 뵌 것이다.” 하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예수님의 간략하면서도 명료한 말씀이 있었음에도 열두 제자 가운데 필립보가 나섭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필립보의 이 질문은, 얼굴을 맞대고 하느님을 직접 뵙기를 원했던 구약시대의 모세와 엘리야의 호기로운 요구를 상기시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하느님의 음성이 흘러나온 ‘불과 미풍’이라는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답을 들은 바 있었으나, 진정한 답은 하느님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취했을 때와, 성부께서 당신의 아들을 영광으로 빛나게 하신 ‘거룩한 변모의 순간’에 –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한 순간이었습니다!(마르 9,4 등 참조) - 비로소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늘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두 귀로 듣고 행적을 두 눈으로 목격한 필립보 이상으로, 우리도 내밀한 체험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받아들이는 데 부족함이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저러한 교회 서적이나 정보를 통해서, 때로는 성경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서 얻은 지식으로 예수님을 외적으로만 받아들인 경우가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단계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서 멈추는 데에 있습니다. 간접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첫 단계로 삼아, 내면화 과정이 진행되어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단순한 지식 획득 차원이 아니라, 관계 형성이나 체험으로 넘어가야 하는 모든 종류의 대상처럼 말입니다. 흔히 내면화의 단계는 마음속 깊이 자리한 애착, 접촉을 갈망하는 욕구, 순간적인 열정으로 귀착될 수 있으나, 더 나가야 합니다. 신앙의 단계이며, 성령께서 이끄시는 단계입니다. 성자께서 이루신 구원의 신비 속으로 들어서게 하는 유일한 힘이며 통로인 성령의 인도로 비로소 하느님 아버지와의 일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성부와 성자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고 증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이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안에 있다’ 하는 표현은 결국 완전한 일치를 대변해주는 표현입니다. ‘안에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비워야만 합니다. 그 크신 하느님을 이 작은 마음에 모시기 위해서는 온갖 쓸데없는 것들을 비우고 털어버려야 하며, 그 크신 하느님 안에 내가 있기 위해서는 몸집을 최대한 줄이고 낮추려는 자세가 절실합니다. 쉬운 작업은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사랑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든 인간 상호간의 관계든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인간 상호간의 안에 있기’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기’ 과정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성부의 뜻에 따라, 그리고 성령의 인도로 우리 안에 계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고 수난하시고 부활하신 성자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오늘 하루 조금 더 비우고 낮추고 내려놓는 자세로 먼저 형제들 안에 머물고, 끝내 하느님 안에 머무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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