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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5-02 조회수 : 155

성모 마리아께 먼저 동기화 하라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루카 1,46-48) 
 
찬미 예수님.
성모님의 달 5월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을 왜 사랑하고 공경해야 하는지 묵상하려 합니다.
얼마 전 박진영 씨가 가톨릭을 비판하며 예수님께 직접 아뢰면 되지 성모님이나 성인들을 통하여
기도를 전달하느냐고 한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육체로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지 지금은 하느님으로 계시는 데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예수님께 아뢰면 된다는 것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첫 기적을 거부하시는 예수님께 성모님은 첫 표징을 얻어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 안 될까요?
하늘나라에서 그분들 관계가 바뀐 것일까요?
이것은 동기화의 하나 됨의 원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무언가와 동기화되어 삽니다. 동기화란 그것에 속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동기화를 이해하기 위해 ‘아바타’란 영화를 생각해봐도 좋겠습니다.
주인공 제이크 설리는 인간의 몸을 기계 안에 눕히고 나비족 아바타와 신경을 연결합니다. 핵심은 링크입니다.
그가 아바타와 연결되었을 때, 이전 자기 몸과는 끊어집니다. 아바타가 달리면 그는 자유를 느끼고, 아바타가 다치면 현실의 몸도 비명을 지릅니다.
연결된 대상의 감각이 자기 감각이 됩니다.
(출처: 제임스 카메론 감독, 영화 '아바타' (2009)) 
 
우리도 그렇습니다.
자아라는 좁은 캡슐 안에만 갇혀 있으면 체면과 이익이 전부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동기화 되면 그분에 속하게 되고 그분 감정을 공유하게 됩니다.
제이크의 인간 몸은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였지만, 자신이 동기화한 나비족은 사랑이고 하나이기에 그것에 영광을 돌리고 그 감정도 공유하기로 한 것입니다.  
 
동기화 방법은 그것이 원하는 일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영광을 드린다’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아에게 영광을 드립니다.
돈 벌어오라면 돈 벌고 쾌락을 즐기라면 그렇게 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라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동기화를 통해 오는 감정은 순간적인 쾌락과 오랜 불만입니다.
내가 동기화한 자아는 기쁨을 모르는 불만족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은 누구와 동기화되셨습니까? 그리스도와 동기화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성모님의 뜻이 되었고, 예수님의 고통이 성모님의 고통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기쁨이 성모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의 마음에 완전히 맞추어진 사람은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동기화의 방법은 먼저 그분의 ‘고통’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기쁨에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영광을 올린다는 말은 먼저 상대가 원하는 것, 그분의 고통을 완화해 드리는 일입니다.
아바타가 자기 인간들의 탐욕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나비족의 고통을 함께하고 탐욕자들과 맞서 싸우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어서 나비족과 완전히 동기화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와 동기화하면 될까요?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모 마리아와 동기화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성모님은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에 맞추어지도록 도와주시는 가장 안전하고 부드러운 어댑터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깊은 뜻을 한 번에 다 이해하지 못할 때, 어머니는 그 뜻을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 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그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과학적 비유로 말하면 전압 어댑터와 같습니다. 작은 기계를 고압선에 직접 연결하면 기계가 타
버립니다.
전기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기계가 감당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댑터가 필요합니다.
전류의 본질을 바꾸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해 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기화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에 우리 심장이 찔림을 감내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고통은 그 고통보다는 우리가 접근하기 더 쉽습니다. 
 
성녀 베르나데트는 성모님을 통해 십자가를 배웠습니다.
1858년, 성모님께서는 가난하고 병약한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 아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캐물었고, 어른들은 수군거렸고, 사람들은 구경거리처럼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샘으로 가서 마시고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맑은 샘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베르나데트는 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진흙탕 같은 물이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어린 소녀가 흙탕물을 마시고, 얼굴에 진흙을 바르는 모습은 세상 눈으로 볼 때 우스꽝스럽고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행동을 죄인들을 위한 보속의 표징으로 삼으셨습니다.
(출처: 르네 로랑탱, 『루르드의 베르나데트』; 루르드 성지 전승) 
 
여기서 성모님의 교육이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한꺼번에 십자가 전체를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채찍질과 못 박힘을 그대로 체험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흙탕물, 조롱, 작은 보속, 순명이라는 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방식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자녀가 도망가지 않을 만큼, 그러나 반드시 자라날 만큼 십자가를 나누어 줍니다. 
 
베르나데트가 성모님과 동기화되었기에 그 초라한 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바로 동기화되었다면 두려워 도망쳤을 것입니다.
성모님과 동기화되었기에 베르나데트는 조롱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잃지 않았습니다. 
 
사랑은 동기화입니다. 하와는 뱀과 동기화되었고, 마리아는 말씀과 동기화되었습니다.
하와는 자아에게 영광을 돌렸고, 그 결과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감옥에 갇혔습니다.
반대로 마리아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고, 그 결과 하느님의 생명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받아들여 죽음을 낳았고, 마리아는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새 하와이십니다.
뱀의 말에 흔들린 첫 하와의 길을, 말씀에 순명한 새 하와가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우리의 감정을 그리스도께 맞추셔서 모든 생명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저도 화장실에 대변 봉투를 빠뜨렸을 때 바로 아버지께 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중개하시는 분이시고 하늘 나라에서도 이 관계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한 번 그리스도의 어머니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어머니입니다. 
 
성경에 하느님 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사람들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이들은 중개자를 통해 그리스도께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보여주신 카나의 기적의 표징은 죽음 이후에도 지속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께 달려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부 성 암브로시오는 『루카 복음 해설』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마리아의 영혼이 여러분 각자 안에 있어 주님을 찬미하게 하십시오.
마리아의 정신이 여러분 각자 안에 있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게 하십시오.”
(출처: 성 암브로시오, 『루카 복음 해설』 2,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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