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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8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5-08 조회수 : 77

사랑의 능력, 어떻게 얻는가?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2-13)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간 금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가장 위대하고도 무거운 계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내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감정'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감정이 식으면 사랑이 끝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철저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내 안에서 쥐어짜 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공급받아야만 발휘될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내 한계를 뛰어넘어 누군가를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이 엄청난 능력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완벽한 해답을 보여주는 위대한 성인의 실화 하나를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 평생을 바친 성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신부님의 이야기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샤를 신부님이 처음부터 천사 같은 인류애를 타고나서 이슬람교도인 원주민들을
덥석 안아주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01년, 사막 깊은 곳 베니 아베스(Beni Abbes)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는 불타는 선교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그곳의 원주민들을 가르치고 개종시켜 위대한 사도가 되겠다는 인간적인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이질적인 문화와 이슬람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 그의 설교는 튕겨 나갔고, 극심한 가난과 더위 속에서 그의 열정은 금세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내 힘으로는 이 사막의 이방인들을 사랑할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는 철저한 무력감에 뼈저리게 부딪힌 것입니다. 
 
그때 샤를 신부님이 선택한 방법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는 흙으로 작은 경당을 짓고, 매일 성체를 모셔둔 뒤 그 감실 앞에 엎드렸습니다. 가르치겠다는 욕심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현존이 뿜어져 나오는 성체 앞에 하루에 열 시간씩 가만히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감실 앞에서의 오랜 머무름이 1년, 5년, 10년 지속되었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랜 시간 성체 안에 머무는 동안, 신부님의 오만한 선교 계획과 인간적인 한계가 서서히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수액처럼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샤를 신부님은 그들을 뜯어고치려 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의 언어인 투아레그어를 연구하여 사전을 만들고, 전염병에 걸린 원주민들의 곁을 지키며 자신의 모든 양식을 내어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스스로 무슬림들과 똑같은 옷을 입고
그들의 가장 비천한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스스로를 '보편적 형제(Universal Brother)'라 불렀고, 사막의 사람들은 그를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 마라부(수도자)'라고 불렀습니다. 
 
샤를 신부님은 일기에서 자신의 그 끔찍한 사랑의 능력이 어디서 왔는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매일 밤 성체 앞에서의 침묵이 없었다면, 이 성체성사 안에 머무름이 없었다면, 저는 단 하루도 이 메마른 사막에서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을 것입니다.
나를 붙들고 이들을 사랑하게 만든 것은 나의 얄팍한 열정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신 성체이신 주님이십니다."
(출처: 르네 바쟁, 『사막의 은수자 샤를 드 푸코』) 
 
그렇습니다. 사랑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사랑을 지니신 분께 매일 철저히 '머무를 줄 알아서', 내 옛 자아가 죽고 누군가를 더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변화되는 오랜 은총의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당신 곁에 머무르게 하실까요?
바로 '표징(은총)'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은 기적이나 응답, 위로라는 달콤한 은총을 미끼로 던지십니다.
그 은총을 맛보고 주님의 위대하심을 깨달아 당신 곁에 찰싹 달라붙어 머물게 하려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포도나무는 가지가 무언가를 창조해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줄기에 붙어있기만을, 머물러 주기만을 바랍니다.
그것이 은총이 주어지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표징과 은총만 쏙 빼먹고는 가차 없이 주님을 떠나버립니다. 
 
제가 예전에 오산 성당에서 사목할 때의 일입니다.
성당 바로 옆에는 노틀담 수녀원 소속의 수녀님들이 운영하시는 아주 훌륭한 노틀담 유치원이 있었습니다.
시설도 좋고 교육열도 높아 그 지역 엄마들의 로망이었습니다.
입원 철만 되면 평소에는 텅 비어있던 평일 미사 대성전이 젊은 엄마들로 가득 찼습니다.
유치원에 아이들 이름을 미사 예물로 올리고, 미사가 끝나면 저에게 찾아와 눈도장을 찍으며
유치원 원장 수녀님께 낼 '본당 신부 추천서'를 써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제가 추천서를 써주면 웬만하면 입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치원 합격자 발표가 끝나고 그들이 원하던 은총(입학)을 받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 많던 젊은 엄마들이 썰물처럼 싹 사라집니다. 주일 미사조차 나오지 않습니다. 
 
이 복음의 논리를 기가 막히게 잘 보여 주는 성경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루카복음 17장에 나오는 열 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입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가는 동안 모두 깨끗해집니다. 모두가 은총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몇 명이 돌아옵니까?
단 한 명입니다. 그것도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입니다.
그는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안타깝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루카 17,17) 
 
이 질문은 오늘도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많은데, 머무르러 돌아온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아홉 사람은 육신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을 주님과의 '관계'로 바꾸지 못했습니다.
표징을 보고도 낼름 떠나버렸습니다.
단 한 사람만 돌아왔습니다.
그는 은총을 받은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은총을 주신 분께 영원히 '머물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콜카타의 마더 테레사 수녀님과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은 극심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거리에는 죽어가는 빈민들이 넘쳐났고, 고아원과 병원에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수녀들은 잠잘 시간조차 부족했습니다.
수녀들의 얼굴에서는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고,
육체적 피로와 우울증으로 인해 가난한 이들을 향한 '사랑의 능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도, 내면에 짜증과 한계가 차올라 더 이상 사랑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때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세상을 경악게 할 파격적인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부터 우리 수녀회의 모든 수녀는, 매일 아침 성체 앞에서 1시간 동안 의무적으로 '거룩한 머무름(Holy Hour)'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체 앞에 머물며 주님의 사랑을 수혈받지 못하면,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랑의 능력이 고갈되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열심히 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원천이신 분 곁에 무릎을 꿇고 멈춰 서는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매일 아침 성체 앞에 1시간을 조용히 '머무르기' 시작하자,
며칠 뒤 수녀들의 얼굴에 다시 빛이 돌아왔습니다.
1시간의 노동 시간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혼에 성령의 에너지가 폭발적으로 공급되자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효율성과 사랑의 깊이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습니다. 놀랍게도 그해부터 사랑의 선교회에 입회하는 성소자의 수는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주님께 철저히 머무를 때만 타인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부어진다는 것을 수녀회의 역사로 증명한 것입니다. (출처: 캐서린 스핑크, 『마더 테레사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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