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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5월 2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6-05-27 조회수 : 57

사랑은 내 힘으로 할 수 없지만, 결심은 할 수 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르 10,43.45) 
 
찬미 예수님!
연중 제8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뼈아픈 모순을 날카롭게 고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전, "사람의 아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당신 생애의 가장 비장한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야고보와 요한이 다가와 이렇게 청합니다.
"스승님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마르 10,37)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엇갈림입니까?
스승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며 죽겠다고 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피를 밟고 올라가 완장을 차겠다고 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무거운 십자가의 말씀이 제자들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영적 난청'이라 부릅니다. 
 
도대체 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했을까요? 사람의 의지가 '나 자신의 영광과 행복'을 향해 세팅되어 있으면, 아무리 거룩한 진리를 만나도 그것을 오직 '나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만 왜곡해서 듣기 때문입니다.
내 욕망이 앞서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예수님조차 내 출세를 돕는 램프의 요정 지니로 전락해 버립니다.
주님은 오늘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제자들에게 선언하십니다.
기본 장착 시스템, 즉 영혼의 운영체제(OS) 자체를 '섬김을 받는 것'에서 '섬기는 것'으로
통째로 바꾸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직해집시다.
내 이익을 버리고 남을 섬기는 그 '아가페의 사랑'이 내 힘으로 자연스럽게 됩니까?
결코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철저하게 자기 영광을 향하도록
타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힘이 부족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위대한 무기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가 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순교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의지적 결심'입니다.
사랑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결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결심'의 힘이 우리 삶의 행복과 관계를 어떻게 결정짓는지 살펴보기 위해, 최근 우리 사회에서
아주 흥미롭게 나타나고 있는 뚜렷한 통계 현상 하나를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요즘 한국 남성과 일본 여성의 결혼율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각종 통계와 심층 인터뷰를 종합해 보면, 이 현상의 이면에는 양국 남녀가 겪고 있는 깊은
'불안'과 '결핍'의 심리학이 얽혀 있습니다.
왜 일본 남성들과 한국 여성들은 그토록 불안해할까요? 
 
먼저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이라는 기나긴 경기 침체를 겪었습니다.
경제적 성장이 멈추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일본 남성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능력이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불안해진 그들은 과거의 가부장적인 권위에 더욱 집착하며, 여성들에게 더 많은 '섬김'과 '순종'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여성들은 이런 남성들의 권위주의에 지쳐버렸습니다.
장기 불황 속에서 자란 일본 여성들은 남성에게 거창한 재력이나 높은 스펙을 바라는 허상을
이미 내려놓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평범하게 먹고살 수 있는 환경에서
"나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다정한 사람"만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 한국 사회는 어떻습니까?
눈부신 경제 성장과 함께 K-문화의 위상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그 압축 성장과 무한 경쟁, 그리고 SNS의 과시 문화는 한국 여성들에게 지독한 불안감을 심어주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불행한 것이다'라는 강박이 생긴 것입니다.
이 불안감은 외모 지상주의와 더 높은 스펙의 남성을 요구하는 끝없는 조건 비교로 이어졌습니다. 
 
이 높은 요구치 앞에서 한국 남성들도 절망합니다.
경제적 능력만으로 그 무한한 조건을 다 채워주는 것에 한계를 느낀 한국 남성들은, 생존 전략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와 섬김'으로 여성을 만족시키려 피나는 노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엇갈린 불안의 궤적 속에서 기막힌 만남이 성사된 것입니다.
끝없는 비교와 스펙 요구에 지쳐 섬김의 에너지가 고갈된 '한국 남성'이, 물질적 스펙보다 그저 자신을 아껴주는 섬김의 태도 하나면 족하다고 감사해하는 '일본 여성'을 만난 것입니다. 

이 사회적 현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영적 질문은 명확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불안을 채우기 위해 "네가 나를 섬겨야 한다"고 끝없이 요구할 때 필연적으로 관계의 지옥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상처와 결핍을 딛고 "내가 먼저 상대를 배려하겠다"고 '결심'하고, 그 배려에 "감사"로 응답할 때 국경마저 뛰어넘는 구원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주 물리학을 보면 이 '받으려는 자'와 '결심하여 주는 자'의 결말이 얼마나 극명하게 갈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주에는 '블랙홀(Black Hole)'과 '항성(Star, 태양)'이 있습니다. 블랙홀은 엄청난 질량과 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주변의 모든 빛과 물질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이는 것(대접받는 것)' 입니다.
블랙홀은 자신의 불안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만, 결국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어둡고 차가운 공포의 공간이 되어 우주의 괴물로 남습니다. 
 
반면 밤하늘을 찬란하게 밝히고 생명을 키워내는 태양과 같은 항성은 정반대로 작동합니다.
태양이라고 자신의 질량을 잃는 것이 덜 아프겠습니까?
하지만 항성은 자신의 중심부에서 맹렬한 핵융합을 일으켜 자신의 질량을 태워버리기로 '결심'한 존재입니다.
자기를 깎아내고 태우는 그 희생의 에너지를 밖으로 뿜어낼 때(섬길 때), 항성은 수십억 년 동안 우주를 밝히는 빛이 되고 주변에 수많은 행성과 생명체를 거느리는 위대한 중심이 됩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섬겨라, 내 욕망의 스펙을 채워라"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영적 블랙홀입니다.
그 곁에 가면 모든 에너지를 빼앗기기에 사람들은 결국 그를 떠나고 맙니다.
반면 비록 내 본성은 부족할지라도 매일 아침 "내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며 자신을 태워 빛을 내기로 '결심'하는 사람은 영적 태양입니다. (출처: 스티븐 호킹, 『시간의 역사』) 
 
사랑은 내 힘으로 솟아나는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어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억지로라도 먼저 주겠다고 행동에 옮기는 처절한 '결심'입니다.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마태오 복음 강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일갈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타인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서 왕관을 쓰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꺾어 타인의 발을 씻어주기로 결심할 때 천국의 상속자가 됩니다.
사랑할 힘이 없다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사랑의 힘은 주님이 채워주시는 것이며,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오직 빈손으로라도 먼저 주겠다는 단호한 결심뿐입니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마태오 복음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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