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르 12,1-12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평생 도시에서만 살다가 시골에 와서 산 지 벌써 7년 째입니다.
“그 외진 곳에서 심심해서 어떻게 사냐?”고 걱정해주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실상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시 살 때 보다 훨씬 더 바빠졌습니다.
피정 센터가 널리 알려지면서, 주말만 되면 고마운 분들이 우르르 찾아주시니 한가할 틈이 없습니다.
주중에는? 주중에도 소규모로 가족 단위로 찾아주시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피정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저녁이면, 또 다른 하루 중요한 일과가 시작됩니다.
해루질도 나가야지, 우럭도 잡으로 가야지, 참으로 역동적인 나날입니다.
시골에 살다 보니 삶이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시골길을 걸어가거나 차를 몰고 달려갈 때
주변에 펼쳐진 풍경에 대해서 그리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논이려니, 아니면 밭이려니 그랬습니다.
때로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다녔습니다.
그저 때로 푸른 들판이었고, 때로 황금색 들판이었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 농작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식물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게 소중해보이고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이제는 시골길을 지나다니면서 늘 뭐가 심어져 있는지 하나하나 다 확인하고 지나다닙니다.
“야, 저기 봐! 저 밭 고추 모종 정말 잘 자라고 있네.
모종 한 그루 한 그루에 미니 비닐하우스 친 것 봐. 대단하지 않아?”
“올해 마늘 농사 대풍이네. 마늘 농사가 힘들다는데, 어르신들 또 수확하려면 고생하시겠네.”
“저기 저 배추밭 주인은 도대체 농사를 짓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빨리 솎아 줘야 되는데.”
“저 농작물은 처음 보는 건데, 도대체 뭘까?”
결국 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 순간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 출발점은 바로 대상에 대한 마음이 생기기 시작할 때, 관심을 지니기 시작할 때, 결국 사랑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 순간 전에는 조금도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게 되면 우리는 무의식 상태에서 의식 상태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구하고 찾아다니는 하느님, 여간해서는 당신의 모습을 잘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뵙기 어려운 하느님을 생생하게 뵙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토록 듣기 어려운 하느님의 음성을 명료하게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누구겠습니까?
바로 하느님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마음이 있는 사람입이다.
하느님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를 바로 자신들의 코앞에 두고 서도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강한 경고성 메시지가 내포된 예화를 소개하십니다.
소작에 대한 결실을 받아오라고 보낸 주인의 종들을 보내는 족족 처형하다 못해 결국 주인의 외아들(예수님)마저 처형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어제 삼위일체대축일은 저희 사제들에게 약간은 고통스러운 날이었습니다.
우리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신자들에게 설명해야 하니 얼마나 곤혹스럽겠습니까?
갖은 예를 들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명해보지만 흡족하지 못합니다.
결국 하느님은 그 자체로 신비스러운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어쩌면 신비스러운 그 자체로 남겨져 계셔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모든 것이 다 밝혀지고, 그분의 실체에 대한 모든 것이 다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느님을 찾지 않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좀 더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분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그분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분이 ‘사랑 그 자체’이신 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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