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절정을 제시하신다.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요구하신다. 이 계명은 인간의 본능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드러난다.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이 말씀은 우선 원수를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그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Enarrationes in Psalmos, 109, 4 요약) 즉, 증오는 상대방보다 나 자신을 먼저 병들게 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증오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기도는 그분이 삶과 죽음으로 보여 주신 실천이었다. 초대 순교자 스테파노도 같은 사랑을 드러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라고 기도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가리켜 “스테파노는 말로만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닮았다.”(Homilia in Acta Apostolorum, XVII 참조)라고 평가한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성 아타나시오는 이를 이렇게 풀이한다. “태양은 차별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은혜도 그러하다. 그 빛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일 뿐이다.”(Orationes contra Arianos, II, 67 요약) 따라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윤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절대적 완전성에 도달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완전성을 닮으라는 것이다. 교리서도 이렇게 설명한다. “사랑은 모든 덕의 원천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인내하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 사랑은 그 자체로 완전성이다.”(1827항)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선택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우리는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를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 속에서 은총의 가능성이 열린다. 원수를 사랑할 때, 우리는 단순히 더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아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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