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대축일]
충전하는 시간, 소진하는 시간
찬미 예수님. 오늘 우리는 이 땅의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립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조금은 사적인 고백으로 강론을 시작하려 합니다.
저는 얼마 전 안식년에 들어갔고, 그 보름을 지내며 한 가지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소진시키는 시간과, 나를 충전시키는 시간입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삶이 바로 이 두 시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밭에도 안식년이 있습니다 먼저 밭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상한 명령을 하나 내리셨습니다.
"여섯 해 동안 밭에 씨를 뿌리고 소출을 거두어라.
그러나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 두어라."(탈출 23,10-11 참조)
일곱째 해에는 씨도 뿌리지 말고 밭을 통째로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농부의 상식으로 보면 미친 소리입니다.
일 년을 통째로 노는데 무엇을 먹고 살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기에 창조주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땅은 쉬지 않고 소출만 뽑아내면 반드시 메마릅니다.
지력이 고갈되어,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텅 빈 흙이 됩니다.
실제로 현대 농학이 이를 증명합니다.
같은 밭에 같은 작물을 쉼 없이 심으면 수확이 해마다 줄어드는데, 이를 연작 장해라 부릅니다.
반대로 한 철 밭을 묵히거나 콩과 식물을 심어 쉬게 하면, 흙 속에 질소가 다시 채워지고
미생물이 살아나 이듬해 수확이 도리어 늘어납니다.
쉬는 것이 게으름이 아니라 다음 열매를 위한 투자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강론의 열쇠를 얻습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소진입니다.
밭이 자기 안의 양분을 내어 주어 곡식을 맺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소진이 계속되려면 반드시 충전이 있어야 합니다.
안식년이란, 소출을 멈추고 땅 자체를 비옥하게 채우는 시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밭에게도 이 충전의 시간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에게, 사제에게, 영혼에게 이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의 이야기를 조금 더 솔직하게 나누겠습니다.
안식년에 들어와서도 저는 처음에 매일 강론을 써서 올렸습니다.
신자분들이 원하시니, 숙소에 있는 동안이라도 계속 말씀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보름을 그렇게 지내고 나니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 역시 소진하는 시간이 아닌가.
강론이란 결국 내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내보내는 일입니다.
밭이 곡식을 내놓듯, 내 안의 양분을 퍼내는 일입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안식년까지 이렇게 퍼내기만 한다면, 저는 안식년을 안식년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밭을 쉬게 하라는 그 명령을 저 혼자 어기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방향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제부터 이 안식년 동안은 내보내는 강론이 아니라, 모아들이는 성경 통독을 하려 합니다. 올해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마카베오기 하권까지,
구약의 역사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며 짧은 해설을 붙여 올릴 생각입니다.
하루에 세 장씩 천천히 읽어 나가려 합니다. 속도가 붙으면 구약 전체로, 나아가 신약까지도
욕심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통독을 올리는 것도 겉으로는 무언가를 내보내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강론은 내가 이미 가진 것을 꺼내는 일이지만, 통독은 내가 새로 받아들이며 그 넘치는 것을
나누는 일입니다.
앞엣것은 내 곳간을 비우고, 뒤엣것은 내 곳간을 채우면서 그 채워지는 향기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공부는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동시에,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거름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한 해, 강론을 쉬려 합니다.
이 충전의 시간을 오롯이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원하시는 분들은 매일 이 성경 통독 해설을 함께 들으셔도 좋을 것입니다.
어쩌면 잘 다듬은 강론 한 편보다, 날것 그대로의 말씀을 함께 씹어 삼키는 그 시간이 우리 모두에게 더 깊은 거름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이 결심을 하면서 바로 오늘의 주인공, 김대건 신부님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분의 삶이야말로 이 축적과 소진의 신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김대건 신부님을 '한국 최초의 사제'로만 기억합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숫자만 보면 뜻밖의 사실과 마주칩니다.
그분이 사제로 사신 시간은 겨우 일 년 남짓이었습니다.
1845년 8월에 사제가 되어, 1846년 9월에 순교하셨으니 말입니다.
신학생으로 뽑혀 마카오로 떠난 것이 1836년, 열다섯 살 때였습니다.
그러니 사제가 되기까지 약 십 년을 준비하고, 정작 사제로 일한 것은 단 일 년입니다.
십 년을 쌓아 일 년을 쓰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토록 아까운 분을 이렇게 일찍 데려가셨을까.
십 년을 공들여 길러 낸 사제를 겨우 일 년 쓰시다니, 이보다 비효율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토록 한국인 사제를 목말라하던 교우들을 생각하면, 십 년, 이십 년을 더 사목하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이 의문 앞에서 도리어 오늘 강론의 진실을 확인합니다.
그분의 그 십 년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십시오. 열다섯 소년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요동을 지나, 무려 구천리 길을 걸어 마카오에 이르렀습니다.
낯선 라틴어와 프랑스어와 신학과 철학을 밑바닥부터 익혔습니다.
마카오에 민란이 일자 필리핀으로 피난을 갔고, 병약한 몸으로 온갖 질병과 싸웠습니다.
함께 떠난 동무 최방제는 열여섯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국에서는 기해박해가 터져 아버지와 스승과 주교가 순교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사제가 되어 돌아올 때는 상해에서 배를 타고 오다 서해에서 풍랑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러고도 그분은 선교사들이 들어올 뱃길을 뚫으려 지도를 그리고 바닷길을 살피다 붙잡히셨습니다.
보십시오. 이 십 년은 허비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이 십 년이야말로 밭을 비옥하게 채운 충전의 시간이었습니다.
걸음마다, 피난마다, 죽을 고비마다, 그분의 영혼에는 무언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습니다. 믿음이 쌓이고, 인내가 쌓이고,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쌓였습니다.
그렇게 십 년을 응축한 영혼이었기에, 그분은 단 일 년의 사목에서, 아니 마지막 순교의 그 한순간에서, 백 년 사목보다 더 큰 열매를 맺으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한 해, 강론을 멈추고 말씀으로 저를 채우려 합니다.
이것은 물러섬이 아니라, 더 큰 열매를 위한 휴경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십 년을 채워 일 년을 위대하게 사셨듯이, 안토니오가 이십 년을 채워 사막에서 걸어 나왔듯이, 베네딕토가 숨은 삼 년으로 유럽을 바꾸었듯이, 저도 이 한 해를 채워 남은 사목을 더 비옥하게 살고 싶습니다.
성냥이 인화물질을 머금듯, 저도 이 안식년에 하느님의 말씀을 가득 머금어, 언젠가 다시 강단에 설 때 여러분의 촛불에 더 뜨거운 불을 옮겨붙이고 싶습니다.
소진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충전하는 시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하느님 앞에서 낭비되는 축적이란 없습니다. 걸어온 모든 길, 견뎌 낸 모든 고비, 조용히 채운 모든 시간이, 언젠가 단 한 순간에 위대한 열매로 타오를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그러하셨듯, 우리도 그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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