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복음: 마태 13,54-58: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가르치신다. 사람들은 그분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지만, 그 놀람은 찬미가 아니라, 시기와 불신으로 변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55절)라는 말은, 그분의 인성과 집안의 배경에만 매달려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한 불신앙의 상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57절)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운명이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음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이렇게 해석한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거부당하신 것은 그분의 비천한 출신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비천했기 때문이다. 교만한 마음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익숙함은 경외를 마비시킨다.”(In Matthaeum homilia 47 요약)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익숙함의 위험을 지적한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너무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익숙함은 때로 신비를 가린다.”(Sermo 69,3) 즉, 문제는 예수님의 출신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시기와 편견으로 굳어 있었다는 것이다.
교리서는 예수님의 기적과 가르침이 믿음을 요구한다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당신 안에서 다가왔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그 기적은 또한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 없이는 기적이 드러나지 않는다.”(547-548항 참조) 계시 헌장에서, 하느님의 계시는 평범한 인간 언어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고 가르친다(11항 참조). 나자렛 사람들은 인간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하느님의 신비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이렇게 충고한다. “은총은 종종 작은 그릇에 담겨 우리 곁에 다가온다. 그러나 눈먼 이는 그 그릇을 무시하다가, 그 안의 보물을 잃는다.”(Sermo, Adventus Domini 전체 요약)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유혹을 겪는다. 사제나 수도자가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지? 가족이나 친구의 권고를 “네가 뭘 아느냐?”라고 무시하며, 그 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능성을 닫아버리지는 않는지? 일상 속 평범한 사건들을 통해 주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귀를 막고 있지는 않는지?
예수님께서는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라고 요한 복음은 증언한다. 그러나 바로 이 거부를 통해 십자가의 길이 열렸고, 구원이 이루어졌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주님을 내 일상에서 알아보고 있는가? 아니면 익숙함과 편견 속에서 그분을 거부하고 있는가? 우리의 눈을 가린 시기와 편견을 버리고, 가장 가까운 이웃과 평범한 사건 속에서 말씀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알아뵙는 믿음을 청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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