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18,21-19,1: 매정한 종의 비유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21절)라는 그의 질문은 이미 관대함을 전제로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그 한계를 넘어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용서가 무한하며, 따라서 제자들의 삶 또한 그 무한한 자비를 반영해야 함을 뜻한다. 루카 복음이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77세대를 기록한 것(루카 3,23-38 참조)은 단순한 숫자의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세대와 모든 인류에게 베푸신 보편적 용서를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무한히 용서하라는 이 명령은 수의 한계를 넘어, 곧 사랑의 무한성을 가리킨다.”(Sermones 요약)라고 한다.
비유에서 임금은 일만 탈렌트라는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해 준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무조건적 은총과 자비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종은 자기 동료가 진 백 데나리온조차 용서하지 않는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느님께서는 큰 빚을 탕감하셨건만, 우리는 작은 잘못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무자비는 곧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행위이다.”(Hom. in Matth. 61 요약) 주인이 종을 다시 형벌에 넘긴 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받은 자비를 삶에서 드러내지 못한 자의 최종적 상실을 의미한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하실 것이다.”(35절) 용서는 내적 진심의 변화를 요구한다.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용서는 입술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깊은 변화에서 비롯된다. 마음으로부터의 용서가 없으면, 하느님 앞에서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Commentarium in Matthaeum 요약)
교회는 이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본질적 표지가 ‘용서와 화해’임을 끊임없이 가르쳐 왔다. 교리서는 이렇게 밝힌다. “용서할 줄 아는 마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데에 직접적인 조건이 된다.”(2840항) 즉, 우리가 형제를 용서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자비를 충만히 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합당해진다.
우리는 모두 ‘일만 탈렌트’를 빚진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빚을 탕감하셨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백 데나리온’에 불과한 이웃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하는 일이다. 성 베네딕토는 수도규칙에서 “서로 참아주고, 서로의 약점을 끝까지 견디어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길이다.”(Regula Benedicti, 72장 요약)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며, 우리 삶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증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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