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복음: 마태 16,21-27: 자기 자신을 끊어버려라.
1. 베드로의 신앙과 걸림돌
지난 주일,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신앙 고백으로 복음을 정점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이 드러난다. 예수님은 그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23절)라고 말씀하신다. 신앙의 반석이 한순간에 하느님 계획의 걸림돌이 되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신앙 여정에서 늘 일어나는 긴장과 갈등을 보여 준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만, 동시에 인간적 욕망과 세속적 합리성으로 그분의 뜻을 재단하려는 유혹 속에 산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는 스승을 사랑했으나, 사랑의 방식이 하느님의 뜻과 달랐다. 사랑이란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지, 고통을 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In Matthaeum Homilia 54,6 의역)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계산을 초월한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 신앙의 본질을 일깨워 준다. 신앙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 하느님을 내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2. 십자가의 길, 예수님의 순명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당할 수난과 죽음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부활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21절) 이것은 숙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경륜에 대한 자발적 순명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강요가 아니라, 사랑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으셨다.”(De Trinitate XIII,10,14 의역) 십자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이며, 사랑의 최고 표현이다. 따라서 신앙인은 십자가를 피해야 할 고난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길로 이해해야 한다.
3.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24절) 이 구절은 제자직의 헌장이라 불릴 만하다. ‘자기 부정’(自己否定)을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기중심적 사랑의 죽음”이라 표현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안에 머무르던 사랑을 버리고, 하느님 안에서 사랑하도록 변화되는 것이다.”(Sermo 96,1 의역)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참된 자신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이렇게 덧붙이신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복음의 역설이다. 세상은 ‘붙잡는 자가 얻는다.’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내어놓는 자가 얻는다.’라고 말한다.
4. 그리스도의 모범: “비움의 길”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필리 2,7) 그분은 하느님과 동등하신 분이시지만, 자기를 버리고 순명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다. 이 비움의 신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그분 안에서 다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었다.”(Adversus Haereses III,18,1 의역)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삶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자신을 내어놓는 행위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의 성숙이다.
5. 몸을 산 제물로 바치라: 바오로의 해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한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2) 이 말씀은 십자가의 길을 예배의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즉, 우리의 모든 일상적 행위와 희생이 하느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교리서에서 이렇게 풀이한다. “참된 희생은 하느님께 대한 내적 예배의 표현이며, 우리의 전 존재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사랑의 행위이다.”(2100항 요약)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의 제사이다. 우리의 인내, 봉사, 헌신, 용서, 겸손이 바로 그 제단 위에 드려지는 제물이다.
6. 예언자 예레미야와 신앙인의 내적 싸움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당신의 말씀이 심장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분의 사랑에 사로잡혀 결국 순명한다. 그의 고통과 투쟁은 신앙인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십자가란 외부의 형벌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나의 뜻이 부딪히는 자리다.
7. 결론: 잃음으로 얻는 생명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26절) 이 질문은 단지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존재론적 물음이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세상의 것들은 결국 우리 자신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렇게 요약한다. “인간은 자신을 완전히 내어줄 때에만 자신을 완전히 발견한다.”(General Audience, 1980년 1월 16일 요약) 그리스도인의 길은 자기 상실을 통한 자기 회복, 곧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길이다.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불타는 마음으로, 베드로처럼 넘어지더라도 일어나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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