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이들의 희망
어제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이 수종을 앓는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모습을 예의주시하면서, 안식일 규정을 근거로 마음으로 이미 그분을 단죄한 바 있습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예수님이 오히려 식사에 초대받은 동일한 인물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예의주시하십니다.
당시에는 초대받은 사람 스스로 자기의 처지에 맞는 자리를 골라 앉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웬만하면 어림잡을 수 있는 나이순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채기 힘든 품위나 존경의 정도에 따라 좌우되었으므로, 스스로 ‘귀한 사람’ 곧 자신을 존경받고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한 사람들은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썼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윗자리를 고르느라 부심하던 사람들을 향하여 ‘지혜의 가르침’을 선사하시나,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잠언 25,6-7 참조). 어떤 자리에 초대받았을 때 윗자리보다는 아랫자리 또는 끝자리를 고르는 것이 슬기로운 선택이라는 가르침은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초대한 이가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하고 말한다면,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수치스러움의 정도는 가중될 것입니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인간의 심리 세계로 좀 더 들어가 살펴보면, ‘나 못났다!’ 하는 사람이 제 자리를 찾아 명예롭게 윗자리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는 시선보다, ‘나 잘났다!’ 하는 사람이 제 자리를 찾아 수치스럽게 아랫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는 눈초리가 더욱 가혹한 것은 사실입니다. 거의 경멸적이라 해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보편적인 ‘지혜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어떤 사람이 하느님 나라 구성원으로 적합한 사람인지를 말씀하고자 하십니다. 구원의 세계에 관한 가르침으로 넘어가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스스로 비우고 스스로 낮추는 사람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감히 자기 자리를 주장하거나 고집할 수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판은 각자의 자발적인 평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의 판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구원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고유 영역, 인간이 함부로 범접하거나 무엇인가를 주창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터에, 끝자리 외에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의식을 앞세워야 할 것입니다. 최소한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오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비뚤어진 확신을 단죄하십니다. 이들은 낮아질 것입니다. 스스로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자평하며 현세에서 그에 해당하는 혜택을 찾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보상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 세리들, 죄인들, 하느님 앞에 작은 존재임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높아질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하루,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자세로 마음에 주님만을 모시려는 사람들임을 드러내도록 힘쓰는 가운데, 세상의 잣대와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시선을 오로지 주님께 쏟을 수 있음을 행복으로 여기며 감사하는, 귀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