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첫 토요일: 성모 신심 미사]
말씀을 듣고 지키시는 성모님
우리 가톨릭교회는 11월, 이 한 달을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도하며 기억하는 ‘위령 성월’로 지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떠난 가족이나 친지들의 영혼은 물론 죽은 모든 이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할 때, 성모님의 도우심은 절대적입니다. 성모님은, ‘성모송’을 기도할 때마다 되뇌는 것처럼,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시는”, 인자하신 어머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의 전구로 죽은 모든 이의 영혼이 영원한 안식 속에 머물수 있도록 기도하며, 이 한 달을 거룩하게 지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군중 가운데 “어떤 여자”가 외치는 소리로 열립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권위에 찬 말씀과 놀라운 행적 앞에서,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노출하기를 꺼린 나머지, 에둘러 예수님의 어머니를 칭송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훌륭한 아드님, 이처럼 위대한 스승님을 낳으신 어머님을 예찬함으로써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이 찬미의 외침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즉각적이나, 잠시 우리의 생각을 멈추게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예수님은 분명 당신을 어머니와 연결시키는 혈연관계를 부정하거나 경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참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참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를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만을 보여주실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만이 참 행복이며, 참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밝혀주십니다.
한 여인의 외침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참 행복에 이르는 길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복음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말고 좀 더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 속에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가운데 대표적 또는 모범적 인물이 성모 님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구세주 예수님을 잉태하기 전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던 분’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느님의 말씀’이었지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는 순명의 응답으로 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활짝 여신 분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아드님의 구원 사업,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구원 사업에 적극적으로 함께하셨던 분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응답 속에는, 구세주를 세상에 낳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구원 사업에 온몸으로 동참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로서의 모범을 보여주실 성모 마리아를 예찬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확인합니다.
이 한 달, 신앙인의 모범이신 성모님을 본받아, 순명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품고 살아가는 신앙인, 하느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지키는 신앙인, 성모님의 전구로 죽은 이들의 영혼이 영원한 행복 속에 머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나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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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간 토요일]
하느님과 재물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함께할, 재물을 포함한 모든 것을 좋게 보셨으며, 예수님도 삶에 필요한 재물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 시각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 재물을 어떻게 획득하고 사용하느냐를 문제로 삼으실 뿐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재물은 ‘혐오스러운 것’으로, 취득하고 사용하는 과정에서 자주 인간을 의롭지 못하거나 부정직한 존재로 만들어나가는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구약성경, 특별히 에제키엘서에서 ‘혐오스러운 것’은 ‘우상’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신명 29,16; 1열왕 11,5.7; 2열왕 23,13.24; 예레 16,18; 에제 5,11; 7,20; 8,10; 11,18.21 등), 루카 복음 저자는 재물을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우상과 같은 존재’로 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불의한 재물’이라는 표현 뒤에는, 문자 그대로 불의하게 획득한 재물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모든 재물이 죄스럽고 불의하다는 루카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가 산상설교에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말할 때, 루카는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예고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리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마음을 빼앗을 ‘우상적인 존재’로서의 재물로부터 해방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선으로 창조하신 하느님은 재물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관리를 사람에게 맡기셨으며, 관리인에게 우선 요구되는 덕목은 성실함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소유, 곧 재물을 취하는 일이 의롭고 정당한 결과라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그것은 ‘아주 작은 일’일 뿐입니다. 사람이 이 재물들 사용에서 성실함을 보인다면, 하느님은 그에게 ‘큰일’, 곧 ‘영원한 생명’을 관리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야말로 사람이 꼭 소유하여 누려야 할 참된 재물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성실한 삶을 살아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재물을 잘 관리하는 일, 곧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열릴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오늘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사람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듯이, ‘가난’을 하느님 저주의 표지로, 다시 말해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에게 주어지는 마땅한 벌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가난’이 부유함 속에서 누리고 있는 안정된 삶을 파괴하고,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의로움’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고 판단하여 도전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확언은 물론, 나아가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라고 이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담기에는 갈 길이 멀게만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편협한 시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하고 ‘큰일’처럼 보이는 재물 다룸을 ‘아주 작은 일’로 평가하시며, 그 작은 일에 성실할 때 비로소 ‘참된 것’ 곧 ‘영원한 생명’을 말할 수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오늘 하루, 재물은 물론 ‘아주 작은 일’에 얽매여 안절부절못하는 우리의 못난 모습을 반성하며, 오로지 주님 말씀만을 가슴에 새기고 걸어온 신앙의 길을 더욱 열심히 걸어가겠다고 다짐하는, 은총의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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