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 토요일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루카 1,26-38; 이사 9,1-3.5-6)
찬미 예수님!
평화는 언제 오는가? 라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하고 싶습니다.
글을 하나 읽었는데,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장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마음의 평화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평화는 언제 얻을 수 있을까요?
반대로 우리의 마음의 평화는 언제 깨지나요?
많은 신자분들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변화를 싫어하고 교회의 사제들이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을 우려하고 싫어하고 더 나아가서 어떤 분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맞고 사제들은 틀리다고 하면서 적대적이기 까지 하다는 글을 읽고, 사회에 대한 것은 사제들의 전문분야가 아니고 우리가 더 잘 아니까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미사나 잘 봉헌해 달라고 하는 글을 읽고 참으로 슬픈 마음이 들었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커다란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어디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까?
마음의 평화 근처에 가보기나 했을까?
하느님을 향해 있어야 하는 신앙인이 자신만을 향해 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세상이 주는 마음의 평화만을 찾고 있고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추구하는 마음의 평화는 길 위에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변화의 한 가운데 있고, 쇄신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마음의 평화는 자기를 희생하고 치열하게 싸워가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성모님의 모습에는 치열함이 흐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아닌 하느님과 하느님의 일을 위한, 또 세상을 위한, 인간을 위한 자기희생이 있습니다.
이것이 평화의 모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 평화가 하느님이신 당신 아드님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낮추는 당신 아드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정확히 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그래서 평화를 위해, 다른 이들과의 일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것이 우리가 얻으려고 하는 마음의 평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닌 예수님께서 주시는 세상과는 다른 평화입니다.
같은 말을 하면서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정말 커다란 문제입니다.
성모님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의 모후께 전구를 청하는 이는 우리의 주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평화의 모후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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