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0주간 목요일(다해)
제 1독서 : 에페소 6,10~20
복 음 : 루 카 1,31~35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
(루카 13,33)
‘핑계’라는 단어를 국어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이런 뜻이 나옵니다.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공연히 내세우는 구실’ 또는 ‘잘못한 일에 대하여 구차스럽게 말하는 변명’ 이라고 사전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 핑계는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방패막이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미사에 빠진 이유에 대해 주위에 성당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방패막이를 내세웁니다. 실제로 성당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대충 찾아 봤는데 자기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핑계는 대부분 잘못된 일에 대해 다른 것의 탓으로 둘러대는 변명입니다.
우리는 이런 핑계를 찾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핑계 꺼리를 찾고 핑계를 대는 걸까요? 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헤쳐 나가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한 거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럴 때 든든한 방패막이가 하나쯤 있으면 훨씬 수월합니다. 그 방패막이를 우리는 변명이나 핑계를 대면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명, 핑계라는 방패막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또한 어려움을 정당하게 헤쳐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눈앞에 있는데도 핑계만 대고 있다면, 어린아이가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 떼를 쓰고 있는 장면과 비슷할 것입니다. 그래도 어떤 일을 해야 되는데 핑계 꺼리가 있어 피해 갈수 있다면 그러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하지만 “이 잔을 제게서 거둬 주십시오.”하고 기도하실 만큼 피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핑계를 대고 안했으면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 몇몇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께 좋은 핑계 꺼리를 제공해 줍니다. “헤로데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어서 이곳을 떠나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예언자가 예루살렘 아닌 다른 곳에서야 죽을 수 있겠느냐? 나는 내 길을 계속해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핑계를 댈만한 꺼리를 주지만 그 모든 것을 마다하시고, 당신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그 일이란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입니까?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돌로 치는 그곳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그 심장부에서 바로 하느님의 뜻을 보여 주시려 모든 것을 헤쳐나가십니다.
우리들이 두려움 때문에 핑계라는 방패막이를 찾고 있을 때 예수님은 두려움 없이 나아가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는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핑계를 대며 어떻게 좀 빠져나가 보고자 하여도 예수님께는 그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핑계를 대는 모습이 통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았다면 핑계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았다면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두려움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고, 또 그분은 세상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 하나 되어갈 때 우리도 그분처럼 두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아직도 여러 일에서 핑계를 찾으며 망설이고 있다면 주님을 닮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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