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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2월 19일 연중 제 7주일(가해)

작성자 : 김민호 작성일 : 2017-02-19 조회수 : 276

연중 제 7주일(가해)

 

1독서 레위 19,1-2.17-18

2독서 1코린 3,16-23

복음 마태 5,38-48

 

어렸을 때 친구와 싸웠던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도 아닌데 왜 그 당시에는 억울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요. 그 싸움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어디를 가다가 한 친구를 툭 치게 된 것입니다. 친구는 왜 때려!”하면서 인상을 썼고, 저는 내가 너를 일부러 때리려고 한 것은 아니고, 한눈팔다가 너와 부딪힌 거야. 미안해.”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이 친구는 억울하다면서 자기도 한 대 저를 때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서로 공평하다는 것이지요.

저 역시 그래야 공평할 것 같아서, “그래, 한 대 때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싸움이 난 것입니다. 저는 그저 실수로 지나가다가 툭 건드린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는 있는 힘껏 저를 때렸거든요. 저는 왜 이렇게 세게 때려!”라고 항의를 했고,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다시 이 친구를 세게 때렸습니다. 이렇게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공평하다는 것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정확함이지요. 그런데 위의 경우 어떻게 해야 공평할 수 있었을까요?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인다.’는 속담도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물건의 정확한 나눔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 마음이 받은 상처의 크기에 따라 누가 더 큰 아픔을 겪었는가를 공평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자기의 기준만을 앞세우기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힘들어 보일 뿐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기준으로는 공평함을 따지기가 정말로 어렵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오늘 복음의 시작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사람이 자신의 지체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한, 상대에게 악한 행실을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율법입니다. 공평하고 합리적인 율법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이 율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악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는 공평하다는 생각과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또 하나의 억울함을 전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악이 계속해서 반복될 수밖에 없었지요.

 

예수님의 입장은 내가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사랑으로 더욱 더 많은 것을 상대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른뺨을 치면 다른 뺨마저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고,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까지도 가주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악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공평함을 따집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상을 받을 생각보다, 언젠가 하느님께서 보상해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을 하시는 하느님을 닮아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되어갈 때, 하느님의 큰 보상을 받아 진정한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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