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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가해)

작성자 : 김민호 작성일 : 2017-09-21 조회수 : 377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가해)

 

1784년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이후 1886년 한불 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질 때까지 한국천주교회는 인고의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와 1만여 명의 동료 순교자들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은 모습으로 신앙의 위기에서 목숨 바쳐 신앙의 씨를 지켜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은 이들의 처절했으나 눈부시게 빛났던 신앙과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를 생각해보는 달입니다.

한 국가에 천주교가 전파될 때 일반적으로 선교사들이 앞장을 섰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매우 남달랐습니다.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에 의해천주실의라는 책이 들어왔고, 당대의 석학 권철신의 주재 하에 그의 동생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 이승훈, 김원성, 이총억, 권상학 등의 학자들이 서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강학회를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열었던 것입니다.

천주학은 공부를 할수록 이들에게 놀라운 세계를 제시해 주었고 늦게 가세한 이벽의 영향으로 모임은 신앙연수회 성격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서적만으로 진리의 갈증을 채울 수 없음을 아쉽게 여기던 강학회 사람들은 이승훈으로 하여금 동지사로 선발된 그의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가게 하여 천주학을 직접 배워오게 합니다.

이승훈은 한국 천주교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에 관한 많은 서적을 가지고 1784년 봄에 귀국합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이벽,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지금의 명동 성당 자리인 김범우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명례방'이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지속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학자들은 1786년부터 북경의 교회를 따라 이승훈 등을 신부로 임명하여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등 가성직 제도를 시작하게 되면서 사제와 제사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북경의 주교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시행하고 있는데 계속해도 무방하겠습니까?"

 

당장 폐지하라는 구베아 주교의 명령에 순종한 신자들은 신앙생활을 위해 성직자의 파견을 애타게 요청함과 동시에 조상제사 문제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사건이 전라도 진산에서 발생하지요. 윤지충과 권상연 형제가 하느님 뜻에 어긋난다며 신주를 불살라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조상제사를 거부하고 남녀노소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천주교를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사학으로 단정해 대역죄로 엄하게 다스려 뿌리 뽑으라는 명을 내리고 조상제사를 거부한 이들은 유배되어 순교합니다.

1791년 신해년에 박해가 일어나 이승훈, 권일신이 귀향을 가 죽게 되었고, 1886년 한불통상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기까지 피 비린내 나는 100여 년간의 박해가 시작됩니다. 신앙의 자유 이후 감격스럽게도 1893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약현 성당이 세워지고 이승훈 베드로 한 명으로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지금 600여 만 명에 가까운 신자수를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한국 천주교의 역사입니다.

 

오늘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에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부터 박해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렸지만 저는 오늘 어느 한분에 대한 이야기를 드릴까 합니다.

2014년 복자품에 오르신 순교자 중에 황일광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백정으로 천민 중에 천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신자가 된 후 이런 뜻의 말을 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천국이 둘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마친 후 하느님께 가는 천국이 있지만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의 천국도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신자들의 공동체에서도 천국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정이라는 천민으로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인간적 대우를 못 받고 소외와 극심한 멸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신자가 되어 하느님을 믿게 되었고 신자들의 공동체가 그를 천민으로 차별을 하지 않고 한공동체 식구로 받아들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을 알게 된 것도 기뻤지만 또한 이 세상에서 자신을 인간으로서 대우해 주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에 천국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인도의 경우는 초대교회에 천민들이 크리스챤이 되어도 공동체가 받아들이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미사 참례할 때 서로 보이지 않게 가운데 칸막이를 설치하여 몸과 마음이 모두 갈라져 있었습니다. 성체를 모시는 자리였지만 빵처럼 자신을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미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인도의 유명한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일할 때,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일에 교회를 찾아 갔는데, 백인들이 그를 보고 흑인 교회로 가라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 후 간디는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다니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는 백인들이 교회에서 흑인들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들은 신자가 적었지만 따로 교회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신앙의 선조들은 하느님을 위해 순교를 하였으며 이는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순교 이전에 그들이 천민들을 대하던 오랜 관습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나 체면을 포기하면서 그들을 한공동체로 받아들였다는 것부터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나라 교회는 처음에 양반들이 시작했지만 그 후 150여 년 동안 가난한 사람들이 박해를 겪으며 순교하고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교회를 이끌어 왔습니다. 6.25전쟁 후에도 교회에는 거의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왔지만 그들은 교회에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마음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20여 년 전부터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전문직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들어오면서 농민, 노동자 등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소외감을 느끼고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통계를 보아도 부유한 지역에 신자들의 비율이 높고 가난한 지역에서는 아주 적습니다. 교회에서 의도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지 않았지만 중산층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다 보니 자연히 가난한 사람들은 소외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의식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자신들을 낮추고 천민들을 받아들였지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모습으로 오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우리 교회도 그들을 멀리하면 하느님과 멀어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을 위해 순교한 것은 대단한 일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은 뭘까요? 바로 천민들을 한 공동체로 받아들인 일이라고 했습니다. 양반들이 천민들을 상놈으로 천대하지 않고 서로 한 형제로 여긴 일, 그것이 대단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목숨을 바치는 순교 이전에 예부터 내려오던 당연한 관습에 대하여 스스로 죽는 순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 양보! 희생!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실천!

 

신앙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자세가 형제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양보하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도 또 하나의 순교이지요.

한국 순교성인 대축일인 오늘 형제들을 위해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우리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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