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32주간 수요일(가해)
제목 :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오늘 복음 말씀은 '감사가 있는 믿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믿음이란 하루 아침에 생기고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단감 익히듯 시간으로 덮어두고 기다려 얻을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나를 떠나 주님 당신을 향해 있는 것인데도 자신과 세상의 틀 속에 매여 갇혀 있으니 늘 설익은 믿음입니다.
특별한 기회에 가끔은 용감하게 주님께 나를 내맡겨보지만 그 일이 지나고 긴장이 풀어지면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그러니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하시는 주님 말씀처럼 ‘나를 살릴 내 믿음’을 과연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에서 나병이 낫고도 그 엄청난 은혜를 입은 당사자들이 자기를 낫게 해 주신 분을 찾아와 감사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꽤나 황당하고 도대체 무슨 이런 경우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 시대에 하느님 말고 누가 나병을 낫게 했단 말은 들어본 일도 없었을텐데 예수께 와서 그렇게 자비를 베푸시라고, 제발 낫게 해달라고 청했다는 것은 분명 그들의 믿음입니다. 더구나 별다른 치료나 도움도 주지도 않고서 ‘가서 사제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하며 돌려보내시는 주님의 요구에도 그들이 그렇게 순순히 따랐다는 것도 그분께 걸었던 그들의 기대와 믿음이 컸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 믿음의 결과로 사제에게로 가던 도중에, 곧 믿음의 길을 따라 가던 과정 안에서 그들의 병은 나았습니다. 하지만 나병환자 열의 아홉은 거기까지가 그들 믿음의 한계였습니다. 깨끗해진 사람은 열이었지만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드렸을 뿐입니다. 감사를 잊어버린 믿음은 더 이상 그들 믿음이 믿음으로 남아있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들이 다시 믿고 의지하고 싶은 것은 깨끗하게 되돌려진 육신과 그 사실을 보장해줄 율법과 사제들, 그리고 다시 함께 할 가족과 이전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은총처럼 믿음의 눈이 열리고 빛과 희망으로 받아들여졌던 주님을 그들은 마치 어둠 속 섬광처럼 다시 그들 삶의 어둠 속으로 묻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기적은 보지만 정작 그 일을 이루신 주님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조직이 죽고 감각을 잃어 온몸이 일그러지게 했던 육신의 나병은 나았지만 감동과 감사를 잃어버린 영의 무감각은 그들의 또다른 나병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열심히는 하고 싶은데 늘 마음뿐이라 합니다. 감사드릴 일들도 많은데, 왠지 요즘에 와서는 기도도 못하고 주일도 잘 못지켜서 주님께 정말 죄송해 죽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정말로 주님을 믿기는 믿고 있습니까?”
믿음은 아스피린처럼 철따라 증상따라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복용하는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삶의 시작과 마침 그 전부를 위한 우리의 마음, 우리 영혼의 자세입니다.
현재를 지키고 미래를 다지는 든든한 담보로, 혹은 아홉 나병환자들처럼 기껏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시 회복할 방편으로 삼는 그런 믿음은 아니라야 하겠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나병이 낫자 감사하며 이스라엘의 흙을 담아가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 흙으로 제단을 쌓고 일생을 통해 이제는 오직 하느님만을 섬기며 하느님만을 위해 제사를 올릴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참 믿음이 없으면 호들갑스런 인사치레는 할지 몰라도 참된 감사, 일생을 통한 감사는 결코 드릴 수 없습니다. 감사드림 자체가 믿음의 열매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는 것 자체가 건강한 믿음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는 영적건강의 청신호일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희망을 향해 열려져 있고, 내 삶의 모든 마디 마디들이 기쁨과 평화로 채워지게 하는 기초입니다. 믿음이 결코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 줄 알기에 믿는 이들은 그래서 늘 감사함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 갈 것입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